[올드보이(2003)]
 *제 글쓰기는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영화가 영화인만큼 사족을 달자면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인─애정을 담아 사족을 붙이자면, 제가 올해 들어서야 보고나서 최고의 한국 영화라고 생각한─[복수는 나의 것(2002)]과는 정반대에 놓인 작품입니다. 일단은요…

 …[복수는 나의 것]이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그것이 기존에 보아왔던 친숙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대책 없이 조용하고 사정없이 긴 롱테이크 같은 시각적 스타일이나 얼마 전 제가 따로 포스트를 통해 이야기했던 불친절함도 그러하거니와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되는 세 인물 모두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에서 파국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가는 이야기 구조 역시 관객들, 특히 한국 관객들에게는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드보이]는 다릅니다. 류(신하균)와 영미(배두나), 동진(송강호)을 오가며 건조한 시각으로 사건들의 얽히고 섥힘을 그려낸 [복수는 나의 것]과는 달리 [올드보이]의 이야기 전개는 철저하게 주인공인 오대수(최민식)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얼개는 주인공이 자신을 둘러싼 의문의 음모를 파헤쳐 나가는 전형적인 스릴러의 구조를 띠고 있으며 그 속에서 주인공 오대수는 온갖 방해물들을 지나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영웅으로서의 주인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전 필름 누아르를 연상하게 하는 중저음의 삭막한 내레이션까지 끊임없이 사용되면서 영화는 오대수를 담아내는 데에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시청각적 스타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이 롱테이크를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면서 막막한 느낌을 주었다면 [올드보이]는 다양한 시각적 스타일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친숙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화면분할, 장면 전환시 뚜렷한 컷 없이 바로 다음 컷으로 연결하는 것, 경쾌한 움직임과 컷을 통한 액션 연출, 음악을 활용한 장면의 강렬함 극대화, 고전적인 내레이션 등등.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기법들은 어쨌든 관객들에게 [매트릭스(The Matrix, 1999)]의 플로모 기법을 볼 때 느꼈던 새로운 시청각적 체험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 이런 친숙한 모습이 이 영화를 뻔한 영화로 만들고 있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친숙한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영화의 정서는 여전히 박찬욱스럽고, 관객들에겐 낯선 것입니다. 박찬욱의 복수 정서는 전작과 다른 불같은 스타일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상황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괴로움과, 피해자-가해자 구도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듦으로써 시원스런 결단을 기대했던 관객들을 찝찝하게 만드는 힘까지. 특히 결말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단지 휘황찬란한 소문의 '반전'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항상 말하 바이지만 그냥 처음 볼 때 한 번 놀라게 하는 것 따위로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반전은 전체 구조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이야기를 매듭짓거나 방향을 전환하는 부분으로서 기능을 해야하지요. 반전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다면 그 영화는 되풀이 해 봐도 여전히 반전의 힘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올드보이]의 반전과 결말은 바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로 박찬욱스러운 이 영화의 결말은 영화의 이야기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습니다. 오대수를 향해 끊임없는 애정을 가지고 가던 영화는 결말을 통해 심지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오대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듭니다. 그럼으로써 관객들의 정서를 배신하고, 세계를 엎어버리는 거지요.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과 많이 달라 보이지만, 동시에 같은 영화입니다. 어떤 것이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느냐고 물어본다면 [복수는 나의 것]을 꼽겠지만 어떤 영화가 더 좋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하느라 낑낑거리느니 질문한 놈을 붙잡아다가 15년 동안 감금시켜버릴 겁니다. 뭐, 할 이야기는 더 많지만 어차피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한 번 이상 더 보게 될 영화이니 만큼 일단 첫 감상은 이 정도로만 해두렵니다.



 덧. …따라서, [올드보이] 역시 [복수는 나 의것]식으로 잔인한 영화입니다. 정작 정말 눈뜨고 못 볼 잔인한 장면은 없는데도 관객을 괴롭히지요. 그런데 재밌는 건, [올드보이]에서는 이런 박찬욱 영화의 잔인함에 대한 '논평(?)'이 한 캐릭터의 대사를 통해서 이뤄지고 있답니다. 자세한 대사 내용은 잔인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올드보이] 전체의 내용, 특히 결말 부분과 관련이 있으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보실 때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덧 둘. …따라서, 이번에도 전처럼 '잘 만들었는데 다시 보긴 싫다'라든가 '불쾌한 영화다'라는 평이 나오고 있군요. 기쁜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박찬욱 감독답지 않은 것 같아서. (팬의 애정 어린 소유욕이라고 해도 부인하진 못하겠습니다.)
by sabbath | 2003/11/21 14:22 | 영화 감상문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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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Elliot at 2003/11/21 23:08
내용이나 설정을 전혀 모르면서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이니만큼 약간의 대비는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정도론 버티기 힘들었어요. 말씀 들으니 그런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군요. ^^;

그런데 혹시 다른 영화들이 떠오르지 않으시던가요? 새로운 얘기보다는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중요한 거란걸 알면서도 자꾸만 엔젤 하트며 콜렉터 같은 영화들이 보는 내내 떠오르대요.

유머만큼은 확실히 제 코드였어요. :)
Commented by 가면대공 at 2003/11/22 22:56
굉장한 코메디 영화였어요. 이제는 박찬욱 감독 영화를 보고 나서 어느 부분에서 웃으면 되는지도 알 듯 하더군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3/11/22 23:00
그렇죠? 저도 웃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웃음의 코드를 집어넣는 박찬욱의 유머 감각을 좋아합니다. 이번엔 좀 더 웃음이 편했는데, 나름대로 그것도 매력적이더군요.
Commented by M at 2003/11/23 01:28
누설도 넣어줘요. 0_0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3/11/23 10:56
'대답한 놈을 붙잡아다가'
...실례입니다만 질문한 놈을 붙잡아다가...가 아닙니까?;;;
Commented by sabbath at 2003/11/23 11:40
그렇군요. (젠장)
Commented by sabbath at 2003/11/23 22:01
M / 직접 보고 나서 자신의 블로그에다 하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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