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 : 립핑 DVD를 싫어하기
 DVD를 정리하면서 전부터 거슬렸던 립핑 타이틀들을 따로 추리고 보니 얼추 스무 장 내외가 된다. 대충 20분의 1. 5%. 그래도 최근에는 립핑 타이틀을 사지 않았고 앞으로도 아마 살 일이 없을 것이며 지금 있는 것도 하나씩 치워나갈 테니 이 정도면 괜찮지 않느냐고 어깨를 으쓱해 봤다. 하지만…

 …

 대체 립핑 타이틀이라는 개념을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씨네꼼이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거기 사람들은 대체로 립핑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구입할 때 반발도 거의 없었던지라 확신은 안 선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립핑 타이틀 이야기를 들었고, 언제부턴가 거기에 관심을 가지며 사다가, 언제부턴가 그걸 몹시 싫어하게 됐다.

 내가 립핑 타이틀을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동서미스테리북스를 싫어하는 이유랑 거의 일치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놈들은 법망을 피해 교묘히 "합법"의 영역에서 도둑질을 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정말 합법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이 의기를 꺾고 돈을 날리게 만들며, 그렇게 해서 나온 립핑 타이틀의 질이 좋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정은 이렇다. 전세계적으로 영상물 저작권은 50년 동안 보장된다. 거꾸로 말해서,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 권리가 보장이 안 된다. 허락 없이 DVD 만들어도 된다. 하지만 DVD를 만들려면 당연히 디지털 소스가 있어야 된다. 그 소스는 뭘로 만드나. 당연히 필름으로 만들지(비디오로 DVD 만드는 악질적인 행태까지 논하고 싶지는 않다). 필름 갖다가 스캔하고 화질 음질 보정하고 기타 등등 해서 만드는 거다. 거기에는 분명히 제작사의 노력이 들어간다. DVD 제작사가 하는 일이 그거다.

 그런데 영상물 저작권은 원작에만 저작권을 부여한다. 즉,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서 화면의 잡티를 제거하고 흐린 영상을 복원했다고 하더라도 원작에서 새로 첨가된 것(예를 들어 새로 음향 효과를 넣었다든지 예전에는 없었던 삭제 장면을 본편에 첨가했다든지)이 없다면 저작권을 가질 수 없다는 얘기다.

 립핑 타이틀들은 대부분 이 허점을 이용해서 합법적인 도둑질을 해서 만든 것들이다.

 최근에 드림믹스/다음미디어에서 출시한 킹콩 클래식 디지팩 박스세트를 보자. [킹콩(King Kong, 1933)], [콩의 아들(The Son of Kong, 1933)], [마이티 조 영(Mighty Joe Young, 1949)] 이 세 편의 영화를 묶은 타이틀로, 작년에 워너브라더스에서 피터 잭슨의 [킹콩(King Kong, 2005)](이후 나오는 [킹콩]은 모두 33년 작을 가리킨다) 개봉에 맞춰 내놓은 걸작 타이틀의 립핑판이다. 자, 문제가 뭘까? 일단 박스 디자인과 디스크 프린팅. 워너브라더스에서 정식으로 출시한 코드1과 똑같다. 디자인을 도둑질한 거다. 하지만 진짜 나쁜 건 따로 있다. 이 타이틀의 핵심은 [킹콩]의 부록 디스크다. 여기에는 피터 잭슨이 참여한 2시간 45분 짜리 다큐멘터리가 있다. 여기에는 [킹콩] 제작 과정에서 삭제된 전설의 거미 동굴 시퀀스를 피터 잭슨이 남은 자료를 토대로 복원하는 과정이 담겨 있는데, DVD라는 매체가 생긴 이래 최고의 부록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당연히, 이 다큐멘터리는 작년에 이 타이틀의 출시를 준비하면서 워너브라더스 측에서 새로 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다큐멘터리는 2005년 작이고,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합법적으로 도둑질할 수 없다. 결국 드림믹스/다음미디어는 원래 디스크 네 장이었던 이 타이틀을 세 장으로 축소해서 출시했다.

 좀 더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애초에 킹콩 박스세트는 국내 출시사가 출시할 계획이 없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출시를 준비하고 있는 작품을 다른 곳에서 도둑질해서 먼저 내버린다면?

 베네딕도미디어의 임인덕 신부는 비디오 시절부터 우리나라에 (소위) 예술영화들을 보급하는 데에 힘써온 사람이다. 작년에는 DVD로도 영역을 넓혀 폴란드 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재와 다이아몬드(Popiol i Diament, 1958)], [대리석 인간(Czlowiek z Marmuru, 1976)], [철의 인간(Czlowiek z Zelaza, 1981)]을 정식 판권을 사서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FILM 2.0]에 실린 기사를 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가 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던 과거보다 지금에 이르러 그 환경이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DVD 사업에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저가의 불법 해적 DVD들이다. "몇몇 출시사들이 판권이 필요 없는 퍼블릭 도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영화들을 불법으로 저가에 출시하고 있습니다. 펠리니의 [길],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 라스 폰 트리에의 [유로파] 모두 우리가 계약을 맺고 출시하려다가 포기한 작품들입니다. 우리 같은 조그만 단체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손해도 무척 큽니다. [시골 사제의 일기]는 프랑스의 카날 플러스와 정식 계약을 맺고 마스터 테이프까지 받은 상태에서 포기한 상태입니다. 불법으로 나온 마당에 다시 출시하기가 곤란한 상황이라 계약금을 돌려 받고 싶은데 그마저도 못 받았습니다."

 합법적인 도둑질을 하자면 연도 제한이 있는 만큼 립핑 타이틀들은 상당수가 영화사에 이름난 고전 걸작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емкин, 1925)], 존 포드의 [역마차(Stagecoach, 1939)], 빌리 와일더의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 1944)], 알프레드 히치콕의 [구명선(Lifeboat, 1944)],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1953)],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를 DVD로 보려면 립핑 타이틀에만 의존해야 한다. 이런 영화들은 도무지 출시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도둑질로 지식을 넓히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작년까지 사 모은 스무 편 가량의 립핑 타이틀들을 볼 때마다 죄가 더 무거워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덧 하나. 고전 일본 영화와 립핑의 저작권이라는 글에서 많이 배웠다.

 덧 둘.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영화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립핑 타이틀 구입의 죄를 짓지 않기는 힘들다. 개념이 선 다음부터는(그러니까 대략 작년 중반부터는) 기를 쓰고 막기도 하고, 기존에 립핑 타이틀로 샀던 영화들을 다시 정품으로 구입하자고 나서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외부의 제안을 바탕으로 하여 오즈 야스지로 상영회를 한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씨네꼼이라는 공간을 알 수 있다면 좋은 일일 테니 홍보를 하고 싶으나…….

 덧 셋. 하지만 온전히 불법적인 도둑질을 하는 놈들은 대체 무슨 심산인지 모르겠다. 장 피에르 멜빌의 [붉은 원(Le Cercle Rouge, 1970)], 샘 페킨파의 [지푸라기 개(Straw Dogs, 1971)], 코엔 형제의 [블러디 심플(Bloody Simple, 1984)],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 1991)] 같은 거. 용산 바닥에서 장사치들이 펼쳐놓는 최신 극장개봉작 DVD와는 달리 이런 놈들은 인터넷 쇼핑몰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버젓이 판매된다. 케이스에는 심의번호도 적혀 있다. 대체.

 덧 넷. 기억나는 대표 립핑 회사들의 이름을 나열해본다. 이 중 몇몇은 이름은 여럿이지만 한 회사일 가능성도 다분하다. 씨네코리아, 스카이시네마,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우리 엔터테인먼트, 프리미어, 유니윈미디어, 세일, 플레이스테이션 월드, 한신코퍼레이션, 캐논박스, 영상프라자. 하지만 때로는 정품 잘 내던 회사들이 슬쩍 립핑에 끼어 드는 경우도 있다. 이 세계는 볼수록 요지경이다.

 덧 다섯. 아, 그렇게 사 모은 립핑 타이틀은 하나씩 코드1 정품으로 대체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by sabbath | 2006/03/24 11:27 | 20050523~20061228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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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나르사스 at 2006/03/24 15:58
이런 법제의 틈이 있었다는건 처음 들었습니다.
상당히 놀랍네요. ...뭐 이러니 DVD장사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는게 아닐까요.
Commented by 마르스 at 2006/03/24 17:24
저도 부끄럽지만 립핑타이틀이 있는 것 같네요. 히치콕의 <오명>과 <현기증>. 이게 계속 맘에 걸리는데, 저도 이번 기회에 정리를 해야겠어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6/03/24 17:46
다음, 프리미어, 세일 전부 정품 잘 내던 회사들이지요. 전문지 번들을 제공하기도 했고.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3/24 17:54
rumic71 / 저는 립핑을 전문지 번들로 제공하던 어처구니 없는 회사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일에서 [오명]을 번들로 제공했던 게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3/24 17:57
마르스 / 골치 아프시겠어요. [오명]은 코드1도 절판된 타이틀이고, [현기증]은 정식 출시되었지만 역시 절판된 타이틀이라서. 역시 그런 경우가 가장 망설여집니다. 국내에는 립핑 밖에 안 나와있고 코드1에는 영문 자막조차 없는 경우가 두 번째.
Commented by 『한군』 at 2006/03/24 20:45
길거리에서 파는 DVD를 보면서 어떻게 저 가격에 팔 수가 있나... 했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군요...
Commented by 마르스 at 2006/03/24 22:38
sabbath / 지금 다시 보니, 현기증은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출시군요. 이건 정식출시죠? 그럼 남은 것은 오명이네요.
Commented by 雨氣 at 2006/03/25 00:00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갑니다. 회사 이름을 적어둬야겠어요.
Commented by 『한군』 at 2006/04/11 01:50
새벗님, 온라인에서 제품이 립핑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겁니까?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4/11 11:29
『한군』 / 뭐, 완벽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고요. 저는 가격과 출시사를 제1기준으로 잡고 디자인을 본 뒤 그래도 모르겠다 싶으면 외국 출시작들과 비교합니다.

가격은, 립핑만이 가능한 가격들이 있습니다.1500원, 2000원, 이런 건 립핑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가격이지요. 정식 출시된 작품들은 가격이 바닥까지 내려가도 8~9000원은 합니다.

출시사는, 위에서 말했지요. 좀 미심쩍다 싶으면 그 출시사에서 출시한 다른 타이틀들을 살펴봐서 확인하기도 합니다. 전례가 있으면 다음 것도 립핑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4/11 11:29
디자인은, 이건 DVD에 좀 익숙해져야 가능한 방법인데, 어지간한 립핑들은 립핑만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심지어 케이스를 디지팩으로 만들고 북클릿까지 첨부하여 립핑 주제에 비싼 가격으로 파는 타이틀조차도 이 촌티나는 립핑 아우라는 피할 수가 없어요. 우리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온 [암흑가의 세 사람(붉은 원)], [시골 사제의 일기/저항] 등등이 떠오르는군요.

외국 출시작과의 비교는, 물론 립핑 타이틀 대부분은 외국 영화니까 외국에서 나온 출시작들과 비교해 보는 겁니다. 외국에서는 어느 회사에서 나왔는지, (워너나 폭스 같은 메이저 출시사의 작품이 우리나라의 생소한 회사에서 나왔다면 립핑 가능성이 무척 높지요) 수록된 내용은 어떤지 등등. 특히 크라이테리언 같은 경우는 자기네 자료를 다른 데에 팔지 않으니까 만약 크라이테리언의 내용물이 우리나라에 출시된 DVD에 수록돼 있다면 거의 립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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