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광주영화제 하스미 시게히코 대담
 평론가들, 특히 영화 평론가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긴지도 꽤 오래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대중적인' 취향을 깔보는 듯한 말을 내뱉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발언의 기회 확대 때문에 굳어진 경향이 아닌가 싶다. 원래 잘난 체 하는, 나랑 일면식도 없는 주제에 나보다 뭘 더 많이 알고 그 아는 것을 펼쳐내기 좋아하는 사람을 아껴주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물론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숭배의 대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게다가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일주일 간 노동을 하고 피곤한 관객들에게 이미지를 무차별로 쏘아내는 방식으로 소비되는 동안 평론가들은 느릿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괴리감이 느껴질 만도 하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영화를 '소비'하지 않고자 하는 관객들은 평론가와 좀 더 가까운 위치에 서게 될 거라는 얘긴데… 내가 하는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싶다)

 더군다나 평론가들의 문제도 얼마나 많은가. 돈벌이에 치여 (물론 돈벌이를 모욕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거나 혹은 너무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좋은 평론이 나오기는 쉽지 않겠지. 질문 하나. 과연 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들 중에 마음에 드는 최신 개봉작을 두 번 이상 보고 글을 쓸 정도의 열성과 여유를 가진 이는 몇이나 있는가? 혹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보지 않아도 분석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과 기억력을 가진 이는 몇이나 있는가? 설문 조사는 안 해봤지만 대답이 긍정적일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우리나라 영화 평론의 시간 단위는 '달'이 아니라 '주'니까. (혹시 [스크린]이나 [프리미어]가 평론 체제로 돌입했다면 지적해주시길. 안 본지 오래돼서 지금의 모습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평론가 전체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형세로 변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좋은 평론은 읽고 나쁜 평론은 버리면 될 것을, 평론 자체를 버릴 것까지야. 좋은 평론가들은 좋은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보는 눈을 넓혀준다.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서 왜 저런 면을 보았을까, 왜 이 영화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일까, 왜 내 생각과는 차이가 나는 것일까, 혹은 내 생각과 정말 다른 것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건 감독들이 이 장면을 연출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을까, 이 선택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걸 통해서 관객인 내가 어떻게 반응해주기를 바랐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만큼이나 유익하고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특히 즐거운 것. 좋은 평론가라면(이건 오늘날의─영화광 세대 이후의─감독들에게도 해당되곤 하는 말이지만) 자기가 미덕을 발견한 영화들을 소개해주고 싶어서 죽을 지경인 족속들인 법이다. 물론 홀몸으로 뛰어들어 좌충우돌 해가며 걸작들을 발견하는 것도 좋겠지만, 적당한 안내판은 적당한 도움이 되는 법 아닌가. 특히 영화에 대한 소개뿐만 아니라 영화 보는 눈에 대한 소개도 해줄 때면, 이 별점 과잉의 시대 속에서 상쾌한 바람을 맞이하는 느낌마저 든다.



 아래는 2003년 광주국제영화제에서 존 포드 회고전이 열렸을 때 한국을 방문한 하스미 시게히코과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임재철의 대담 내용이다. [씨네21] 418호에 실린 내용인데,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기사이긴 하지만 옛날 기사들의 경우 글의 모양새가 망가져 있기 때문에 다듬어 봤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이름을 언제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필름포럼에서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Wagon Master, 1950)]를 상영하기 전이었나, 아니면 그 때였나. 아무튼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난 이 사람의 평론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사람의 글 몇 편은 이런저런 책들─[폭력의 엘레지 스즈키 세이준]과 같은─을 통해서 소개가 됐고, 오즈 야스지로에 관한 빼어난 저서는 번역 소개되었다. 내가 그가 언급한 영화들을 거의 보지 않았다는 게 문제일 뿐) 결국 아직 내게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인터뷰뿐이다. 하지만 이 짧은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그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나를 즐겁게 한다. 특히 인터뷰 맨 마지막에 그가 하는 말을 보라! 영화를 '보는' 사람이 갈수록 적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저 한마디가 참 고귀해 보였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개인적으로 마틴 스콜세지는 바보 같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을 했어도 참아줄 만 하지. (많이는 못 참아도)



"영화란,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나 같은 '신경증환자들'을 위한 것"

일본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광주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임재철이 만나다


2001년 2월(290호), 〈씨네21〉이 하스미 시게히코를 찾아갔을 때 그는 도쿄대 총장 임기가 끝나는 대로 '존 포드론'을 쓸 계획이라고 했었다. 그 계획은 이루어졌고,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번 광주영화제의 존 포드 포럼에 흥미로운 논문 한편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60년대 일본 학계에 들뢰즈와 푸코를 소개한 학자이며, 현재 일본 영화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중견감독들에게는 그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어준 진정한 평론의 장인이고, 무엇보다 식지 않는 영화보기 의욕으로 무장한 시네필이다. 그를 포럼에 초청한 또 한명의 시네필, 임재철 수석프로그래머와 하스미 시게히코의 진솔한 대화를 들어보자.


 임재철 중학생 때, 일본을 방문한 헨리 폰다가 존 포드는 한물간 감독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소년의 입장에서 너무 심하다고 느껴, 그때부터 헨리 폰다를 미워하게 됐다는 말을 했었다. 사실 그런 면에서는 나도 비슷한데,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좋아하는 감독들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그런 개인적인 선호는 어느 시절부터 생기게 됐나?

 하스미 시게히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거에 미국영화들이 몰려들어왔다. 그 시기에 미국영화를 한꺼번에 보게 됐다. 그때 본 존 포드의 〈아파치 요새(Fort Apache, 1948)〉, 〈리오 그란데(Rio Grande, 1950)〉, 〈귀향(The Long Voyage Home, 1940)〉 등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었다. 존 포드영화에 대한 취향은 13, 14살 무렵부터 갖게 됐다. 그런데 나도 궁금하다. 당신은 왜 존 포드 회고전을 하게 됐나?

 임재철 나도 개인적인 선호에서 출발했다. 존 포드가 활동하던 때 본 영화는 초등학생 때 본 〈샤이안(Cheyenne Autumm, 1964)〉이다. 하지만 존 포드 회고전은 한국의 영화문화의 현실하고도 관련이 있다. 할리우드영화의 경우 내가 손꼽는 세 명의 감독이 하워드 혹스, 존 포드, 히치콕인데, 이런 고전적인 감독의 영화들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이런 세 감독의 영화를 동시대에 보지 못했다. 마지막 작품을 찍고 있거나 이미 타계했거나. 하지만 이 사람들의 영화를 봐야만 영화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더라. 그런 것들을 나보다 더 젊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영화에 어느 정도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또 존 포드가 이 세 사람 중 이전에 가장 개봉을 많이 하기도 했고 인기도 있었던 감독이란 측면도 있고.

 하스미 시게히코 나에게는 〈샤이안〉에 대한 추억이 있다. 1963년에 개봉 첫날 파리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존 포드 영화라고 해서 관객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대작이기 때문에 들어온 것인데, 사람들은 그냥 웃고들 했다. 당시 유럽은 미국영화와 인도주의를 비웃던 시기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대부분이 그 영화에 대해 불만을 터뜨릴 때 어떤 청년 하나가 일어나서 "이 영화야말로 존 포드 영화다. 존 포드가 당신들 같은 부르주아를 위해서 이런 영화를 만든 줄 아냐", 이랬다. 그 얘기를 할 때 딱 세 사람이 박수를 쳤고. 그중에 내가 있었다. 그 청년은 이 영화가 바로 존 포드 최고의 영화니까 당신들은 이 영화를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청년이라기보다는 열대여섯 살 먹어 보이는 아이였는데, 하도 심하게 주장을 하니까 같이 온 어머니가 충격을 받고 쓰러져버렸다. 그 옆에 있던 한 여자가 존 포드를 존경하지 말고 당신 어머니나 존경하라고 말했고, 그 말이 빌미가 되어 극장 안에서는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런 기억으로 봤을 때 확실히 존 포드는 대중에게 유명한 감독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감독이다. 다시 청년을 만나면 이제는 존 포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정한석 일반관객의 경우 존 포드의 영화는 쉽고 재미있게 보는 경향이 있다. 관객에게 이런 점만큼은 꼭 놓치지 말고 보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나?

 하스미 시게히코 히치콕이나 혹스, 존 포드는 무성영화 때부터 영화를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무성영화란 것은 이미지로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섬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면이 있다. 무성영화를 한 감독들의 경우는 언어 대신 운동, 행위를 사용한다. 그 감독들의 영화에서 대사만 들으면 뭐 이런 영화가 있나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운동과 행위를 같이 본다면 뛰어난 영화들이 된다. 그 운동을 얼마나 섬세하게 찍어냈는가, 이 점을 놓쳐선 안 된다. 세미나에서 피터 레만 교수가 지적한 동굴이나 문들도 존 포드 영화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색자(The Searchers, 1956)〉의 사막에서 존 웨인이 왜 돌을 던졌는지 하는 등의 그런 문제를 나는 강조하고 싶다. 그게 바로 존 포드에 대한 나의 주안점이다. 〈리오 그란데〉의 경우, 밴 존슨이 통조림을 던지면서 활극이 시작되고, 그 던지는 운동에서 또 다른 운동이 촉발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무성영화적인 것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임재철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존 포드의 영화는 30, 40, 50년대 이런 시기상 구분을 할 수도 있다. 이중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스미 시게히코 어제 몇 편을 추천하긴 했는데 그건 이번 상영작 중에 고른 것이고, 그걸 벗어나서 말하자면, 1917년의 〈스트레이트 슈팅(Straight Shooting)〉이 있다. 오히려 나에게는 특정한 시기보다 시대마다 그런 작품이 있는 셈이다. 1920년대에는 〈켄터키 프라이드(Kentucky Pride, 1925)〉, 이 영화는 유명하진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 판권까지도 사고 싶다. 1930년대에는 윌 로저스가 등장한 세편의 영화가 최고다. 1932년 작 〈말썽쟁이(?)〉도 그렇다. 〈정보원(The Informer, 1935)〉,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40)〉가 존 포드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나은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임재철 동감이다. 〈분노의 포도〉는 한국에서도 굉장히 잘 알려진 영화이고 많은 사람들이 존 포드를 입문할 때 이 영화를 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영화들이 존 포드를 휴머니즘적인 감독으로 잘못 생각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하스미 시게히코 당신은 존 포드의 어떤 영화들을 좋아하나?

 임재철 나는 오히려 메시지가 없어 보이는 영화들, 존 포드가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것 같은 만든 영화들을 좋아한다. 〈웨건 마스터(Wagon Master, 1950)〉나 1960년대의 〈도노반의 산호초(Donovan's Reef, 1963)〉 같은 영화들.

 하스미 시게히코 그 영화들은 꼭 재미뿐만 아니라, 테크닉을 넘어서서 영화가 이런 경지에 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들이다. 덧붙이면 61년의 〈말 위의 두 사람(Two Rode Together, 1961)〉도 그런 영화이다.

 임재철 이미 말했듯이, 존 포드 영화 중에도 〈분노의 포도〉처럼 메시지가 강한 영화들이 한국에서는 인기가 있었다. 나는 그런 부분이 오히려 존 포드라는 영화감독이 얼마나 뛰어난 영화감독이었는가를 가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사람이 리버럴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 남성적인 감독이라는 점의 강조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나도 〈스트레이트 슈팅〉 같은 건 비디오로 봤고, 1930년대 영화 중에서 유명한 것들은 상당수 봤지만, 1920년대 영화는 본 게 한편도 없다. 그래서 당신과 대화하다보면 콤플렉스에 빠질 때가 있다. 한국 문화에서 그런 식으로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 나도 포드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트레이트 슈팅〉을 보기 위해 프랑스까지 갔었다. 아마 당신이 내 나이쯤 되면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정한석 어린 시절에 존 포드 이외에 매혹되었던 감독들에는 또 어떤 사람들이 있나?

 하스미 시게히코 오즈 야스지로, 장 르누아르. 오즈를 좋아하는 만큼 나루세 미키오와 미조구치 겐지, 하워드 혹스도 좋아한다. 그러나 영화를 알고, 영화에 접근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세 명을 꼽으라면 역시 오즈 야스지로, 존 포드, 장 르누아르이다.

 임재철 오즈 야스지로는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고, 당신은 거기에 맞춰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사실 일본의 젊은 관객조차 오즈 야스지로 하면 거의 두 가지 반응이다. 굉장히 지루한 감독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굉장히 웃기다고 보는 것. 그렇다면, 지금 일본 문화 안에서 오즈를 보여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스미 시게히코 존 포드도 같은 경우지만, 영화에 만약 신이 있다면 그들은 그 신에게 사랑받은 사람들이다. 오즈와 존 포드의 영화를 보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영화의 신으로부터 사랑받은 이 영화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영화는 열심히 노력하면 아무나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 형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오즈 야스지로이다. 대표적인 것이 증명사진처럼 찍어내는 정면숏이다. 관습을 넘어선 이런 창작들이 오히려 거의 영화를 모르는 사람이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이게 할 정도인 것이다. 사실, 미국의 데이비드 보드웰은 오즈가 리버스숏 없는 영화형식을 창조한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존 포드만 해도 리버스숏을 쓰기 싫어했고, 꼭 써야 할 때도 일부러 시선을 맞지 않게 찍었다. 1930년대 사샤 기트리 역시 리버스숏을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다. 다만, 오즈가 두드러지게 거론되는 이유는 오직 그만이 죽을 때까지 그 방식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드웰은 오즈가 그 방식을 창안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리버스숏을 찍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은 영화를 찍을 때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거기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리버스숏을 단순한 관습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종종 젊은 감독들의 경우 아무 생각 없이 쓸 때가 있다.

 임재철 세대를 내려와서 말해보자. 당신에 의해 알려진 감독이 바로 스즈키 세이준과 가토 다이다. 그런 감독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즈키 세이준은 이미 잘 알려졌지만, 가토 다이의 경우는 한국 관객에게 낯설다.

 하스미 시게히코 스즈키 세이준은 전위적이다. 거칠고, 자유롭다. 가토 다이는 굉장히 클래식한 면이 있다. 가토 다이는 무성영화를 비롯해 영화보기를 무척 즐겨한 사람이지만, 스즈키 세이준은 자신이 감독이면서도 영화라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감독은 외국에서도 통할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스즈키 세이준은 1981년에 최초로 소개했고, 가토 다이도 비슷한 시기에 소개했는데, 가토 다이는 이탈리아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임재철 가토 다이의 영화 중 추천을 해준다면.

 하스미 시게히코 〈바람과 여자와 방랑까마귀(?)〉, 그 밖에도 다른 감독을 꼽자면, 야마시다 고오사쿠, 구도 에이이치 등이 외국에 소개하고 싶은 감독이다. 그렇게 소개하고 싶은 감독을 얘기하면 끝이 없다. (웃음)

 정한석 그렇다면, 당신의 일본 영화감독 베스트 5를 꼽는다면?

 하스미 시게히코 야마나카 사다오,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우치다 도무 그리고 한명을 더 꼽는다면 마키노 마사히로. 혹시 마스무라 야스조라는 감독이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나?

 임재철 아직 없지만, 곧 소개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시네필들이 많다고 할 수는 없고 영화를 볼 기회 측면에서도 일본에 비해 많이 뒤지는 편이다. 한국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많은데, 시네필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그 두 가지가 일치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실제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뉴욕에 있을 때 느낀 점은 미국에 영화보기를 별로 즐기지 않으면서도 영화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하스미 시게히코 그렇다. 영화연구는 영화가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시네필이 영화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요즘은 당신이 말한 그런 학자들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많다. 영화를 보아야만 계기가 생긴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DVD가 해가 될지 이익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영화학교들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들을 하는데, 세계 각국에서 그나마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사회주의권 영화학교뿐이다.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영화학교는 별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영화학교를 충실히 운영하면 좋은 감독이 나온다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영화학교들이 많지만 과연 그것들이 영화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겠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자들 중에 수오 마사유키, 구로자와 기요시 등이 있는데 이들이 전문 영화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다. 예산도 없이 시작했고, 그럼에도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

 정한석 구로자와 기요시, 수오 마사유키, 아오야마 신지 등이 당신의 수업을 듣고 감명받아 영화를 시작했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하스미 시게히코 구로자와 기요시의 경우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8mm영화를 만들던 작가였다. 다만 내가 충고해준 바는 오즈 야스지로를 좀 보라고 한 것이다. 수오 마사유키는 불문학도였기 때문에 불문학 수업에서는 본 적이 있지만, 글쎄 영화강의 수업에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오야마 신지의 경우는 1학년 때부터 문장력이 정말 뛰어났다. 맨 처음 제출했던 레포트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대한 것이었는데, 정말 굉장한 문장력이었다.

 정한석 덧붙이자면, 한국에서는 '영화를 읽는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스미 시게히코 미국의 영화연구는 어떻게 읽을까 하는 점에 치우쳐 있다. 시각적인 문제들을 놓쳐버린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보이는지 자꾸 물어보면서 학생들에게 흥미를 자극했다. 읽는다는 것은 대상과 거리를 두면서 선별과 취합을 해야 한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기억에 담아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의 세대는 비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영화를 보아야만 했다. 영화를 보는 모든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비디오는 단지 기억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영화란 바로 그런 보는 것,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나 같은 '신경증환자들'을 위한 것이다.

 ■ 진행 · 정리 : 정한석 mapping@hani.co.kr / 사진 : 정진환 jungjh@hani.co.kr


돌멩이를 던지면,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하스미 시게히코 시네포럼 '포드와 던진다는 것' 요약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마의 질주', 혹은 '남자들의 난투' 그리고 '합창, 댄스, 행진' 같은 누구나 반사적으로 상기해내는 그런 포드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오히려 한편의 영화 속에서는 사소한 세부로 나타나 쉽게 흘려버리게 되면서도 작품을 넘어서서 반복됨에 의해 확실한 의미를 띠게 되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나는 포드적인 '주제'라고 이름 붙이려 한다. 작품에 따라 그 의미도, 기능도 달라지게되는 그 주제의 배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기서는 존 포드 영화에서 '무언가를 던지는' 장면을 정리해보려 한다.


 다양성 | 존 포드의 영화에서 던져지는 물건들은 매우 다양한 것들로서 보통은 별로 던지지 않는 것들이다. 〈아파치 요새〉에서 계곡 아래로 던져지는 위스키 병, 〈리오 그란데〉에서 바위의 비탈진 곳에서 던져지는 통조림 등은 '던진다는 것'의 순수형태라 할 만한 상쾌한 운동감을 영화에 도입한다. '던진다는 것'이 전자에서는 시퀀스의 끝을, 후자에서는 그 시작을 알린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내러티브적인 구조 자체가 '던진다는 것'의 주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돌 | 땅바닥에서 작은 돌을 주워 던지는 것은 두드러지게 포드적인 몸짓의 하나이다. 그 표적은 두개가 있다. 첫 번째는 의도적으로 말을 향해 던지는 경우로 〈역마차〉의 존 웨인은 〈황야의 결투〉의 빅터 마추어 이상으로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 채찍을 사용하는 것보다 유효하게 말을 달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서부극에서 말에게 돌을 던지는 동작은 극히 드물며 조지 뱅크로프트가 던지는 돌멩이에 의해 마차가 달리게 되면서 〈역마차〉가 끝난다는 것을 상기할 때 '던진다는 것'의 내러티브적인 기능의 중요성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돌멩이는 또 가까운 연못이나 강을 향해 절망적으로 던져지는 경우가 있다. 〈수색자〉에서 사막의 호수를 향해 존 웨인이 돌을 던지자 마치 그 몸짓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그 앞의 모래언덕에 내털리 우드의 그림자가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가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 던질 때 포드의 작품에서는 반드시 새로운 상황이 생기게 된다.

 행복한 몸짓 | 행복한 만남을 예고하는 몸짓으로 모자, 성냥 그리고 담배를 던지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황야의 결투〉에서 모자를 던지는 행위는 〈조용한 사나이〉에서보다 큰 규모로 반복되며 던지는 남자를 주위의 여자에 접근시키게 한다. 〈롱 그레이 라인〉에서는 여자의 머리로부터 모자가 떨어지는 순간에 남녀의 접근이 일어나게 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는 그것이 어둠 속에서 램프를 켜는 주제와 맺어지며, 〈리오 그란데〉와 같이 포옹의 전주곡이 된다.

 비극적인 몸짓 |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예외적으로 라이플총이 두 인물 사이를 왕복한다. 이것은 포드에게는 불길한 이미지이다. 사실 그 뒤 존 웨인은 주위에 동전을 집어던지게 되는데 그것은 〈밀고자〉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동전처럼 주인공을 궁지에 몰아세우는 것으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어머니의 에이프런 위에 던져지는 동전의 행복한 의미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되는 몸짓이다.

 미장센 | '던진다는 것'은 포드에게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고독한 몸짓이고, 하워드 혹스의 〈탈출〉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로렌 바콜에게 던지는 성냥처럼 두 인물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사실은 포드적인 인물이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는 개인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흉포한 고독을 자신 속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던진다는 것'은 보는 자를 '이야기'와는 다른 '연출'(미장센)의 영역으로 불러들이는 주제론적인 세부이고 그 의미는 작품마다 다르며 분노나 희열 같은 전혀 이질적인 개인의 정동적인 변화를 필름에 새겨 넣게 된다. 오즈의 작품처럼 포드의 작품도 '내러티브'는 단조롭지만 그 '주제'의 의미는 극히 풍부하고 때로는 모순되기조차 한다. 그 풍부함과 모순을 앞에 두었을 때 우리는 포드가 아직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영화작가라는 점을 다시금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덧. 그나저나 어렸을 때 TV로, 혹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고 그게 지금의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부럽다. 내게는 도무지 그런 '원체험'이 없어서. 그렇다고 다른 뭐가 남아있는 것 같지도 않고.
by sabbath | 2006/06/13 19:24 | 스크랩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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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ion at 2006/06/16 19:25
이 포스트에서 본 것 이외에는 잘 모르는 분이긴 합니다만 "비디오는 단지 기억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는 상당히 공감이 갑니다. 재감상하다보면 새로이 보이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 무의식이 의식으로 떠오른 것 뿐이랄까 그런 느낌이 - 제 처지에는 그래도 영화를 좀 많이 보고 있는;; - 요즘 많이 들어서요^^;
Commented by 킬미 at 2006/06/16 20:09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은 글입니다. (나름대로 흥미)
아마도 문제는 영화라는 매체의 단순성에 있을 듯싶습니다.
영화는 감독들이 아무리 극복하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단순화시키는 매체죠.
아무리 거대한 스케일을 가진 영화라 해도, 영화는 하나의 간단한 줄거리와 하나의 단순한 도덕률만을 필요로 하는 경향이 강하죠. 더욱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선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들은 거의 실패했기에 작가주의를 부분적으로 버려야 하고요.
상업시장에선 극장용 영화가 아니면 아예 영화로도 취급하지 않잖아요. 악평도 관심인데 그런 기회 조차 없는 영화들이 너무 많죠. 많은 기회주의 영화관련인들은 상업영화의 유치하고 저속함을 일시적인 가벼움의 미학이라고 자랑스러워하죠.
그래서 영화비평가들의 한계가 바로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에 맞물려있다는 것입니다.
Commented by 킬미 at 2006/06/16 20:10
대량산업화에 의해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모든 문화가 인스턴트 된 시점에서..영화의 소재는 누구나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쉽고 뻔해야 하고, 관객은 정해진 시간의 흐름에 맞춰 빠르게 감상해야 하고(깊이 있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한번에 감상하기엔 너무 빠른 진행 속도), 장르영화를 계속 읅어먹기 위해 코드의 중요성을 두각하고 패러디까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고품화시켜 장르 마니아를 양성해냈고, 결국 영화는 현실을 재현한 스토리 구조와 상업적인 편집 특성상 진정한 소통과는 거리가 먼 난잡한 기호들의 묶음들만 엉성하게 나열하게 되죠.
Commented by 킬미 at 2006/06/16 20:17
더욱이 상업시장의 압박 때문에 전문 영화비평가들도 대중이 원하는 영화들 중심으로 평가를 해야 했음으로,
원래 평범하고 간단한 대상일수록 감독의 주제의식과는 별개로 초점이 없는 수많은 관점만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배보다 배꼽이 큰 식의 해석이 난무하게 되고,
단순한 소재를 갖고도 깊이 있는 주제를 논하고 싶은 영화비평가들은 영화를 철학과 관련시켜 원본적인 이론 중심으로 설명함으로써 일반관객들이 거리감과 소외감만 느끼게되죠. 왜냐하면, 일반인들이 감상한 영화에서는 충분한 설명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적 평론과 연관성을 찾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러니 인기 비평가들은 누구나 가장 이해하기 쉬운 정치의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단정적으로 해석하고 독자들의 선동을 자꾸 요구하죠. 결국은 작가주의영화가 감독의 스타일만 중요해듯이, 평론도 영화보다 커진 평론가들의 이상만 상업적으로 부풀어지죠.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6 22:57
Sion / 덧글과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만 "기억" 이야기를 꺼내신 김에 본문에다가 약간 (너절하게) 덧붙입니다. (이걸 두고 보통 inspired by 누구누구 라고 하는 거겠죠)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께서 기록 매체가 발달하고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사람들이 정보를 자신의 머릿 속에 담아두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런 경향의 한 극단이 영화를 소비하는 모습에서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앞에 나온 영상, 앞에 나온 정서를 담아두면서 그것을 물고 흐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에 순간순간 눈과 귀를 맡긴 뒤 그게 지나가면 바로 버리면서 다음 이미지와 사운드에 탐닉한다고나 할까요. (더 이상 기억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 요구할만한 오락으로서의 영화…)

순간순간을 즐겁게 보내고자 하는 열망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그래놓고 영화에 대해서 '단호하게' 왈가왈부 하고 평가하려 드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건 몇 가지 남는 인상에 대한 기록일 뿐일 텐데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6 23:00
Sion / 하스미 시게히코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 영화를 복기할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기억하여 그것을 토대로 생각하라, 뭐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순간, 그 경험의 순간에 눈과 귀를 홀리고 지나가는 것들을 그냥 놓아버리지 않고 꼭 붙든 채로 다음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맞이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요. 그럼으로써 그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흐름을 이해하는 것. 그게 능동적인 영화 보기고 영화를 일회용 소비재가 아니라 두고두고 감상할 예술로서 대하는 태도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후 자신의 영화 보기를 확인하는 수단으로서의 비디오)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6 23:00
Sion /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면, 그러나 산업으로서의 영화는 그 과정이 요구할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에 맞춰줄 생각이 없을 것이며, 오늘날─블록버스터 시스템의 등장 이후 짧게 한 번에 쏟아붓고 사라지는 영화들의 시대─의 비평가들이 접하는 당혹감 또한 그런 데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전 DVD(와 같은 기록 매체)와 인터넷을 통한 발언권이 그런 흐름에 역행(?)해 볼만한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만…….

참, 그나저나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은근히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6 23:11
킬미 / 말씀하신 부분 중 영화 매체의 한계(저는 굳이 한계라기보다는 특성 정도로 해두고 싶습니다만 ^^;)에 관해서 극히 공감합니다. 특히 시장논리에 의해 발생한 한계 말고, 시장논리가 없었더라고 해도 영화가 가져야만 하는 한계, 즉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요. "관객은 정해진 시간의 흐름에 맞춰 빠르게 감상해야 하고(깊이 있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한번에 감상하기엔 너무 빠른 진행 속도)"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게 영화 매체의 핵심 중 하나이리라고 봅니다. 정보가 시간에 내몰리는 거요. 물론 기록 매체 덕분에 얼마든지 앞 장면을 다시 볼 수 있지만 어떤 영화 창작자들도 그런 감상법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작품을 창조하지는 않죠. 물론 시간에 내몰리는 예술은 영화 말고 음악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영화는 음악과 달리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그 놈의 흘러가는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이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다르겠지요.

뭐, 저만의 답이 있다는 건 아니고, 다만 이 '속도감 넘치는' 예술의 특성이 많은 오해를 조장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곧잘 해오던 것이기에 해본 이야기입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6 23:36
킬미 / 그리고 하나 더 공감가는 말씀은, 영화의 단순성에 관한 것인데요,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이것이 하나의 줄기를 가지고 전개하고자 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뭐, 제가 그런 종류의 영화를 많이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앞서 말한 그 '흐름'의 특성 때문에, 결국 영화란 하나의 물음(감정)을 가지고 관객을 끌어들여서 그 물음에 동참하게 만드는 예술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지금 이 순간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나를 어디로 어떻게 흘려 보내려고 하는가'를 가장 중요한 물음으로 삼고 영화를 보게 됩니다.

만드는 사람은 영상과 소리를 가지고 어떻게 관객을 그 지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을까, 보는 사람은 저 영상과 소리가 나를 어느 방향으로 몰고 싶어하는 걸까, 그걸 서로 궁리하고 겨루는 과정이 영화가 아닐까요? 그리고 비평가들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영화를 본 뒤, 만드는 사람의 선택(과 그 원인)을 예상해 보고, 그 시도가 보는 사람에게 얼마나 먹혔는가를 판단하면 되는게 아닐지요. 제게는 그게 좋은 평론의 모습인 듯 합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6 23:37
…서당개 삼 년 어쩌고 라더니, 씨네꼼 가입 3년 차에 별 소리를 다 하고 있군요. 내년에 이 덧글들을 읽어보면 어떠려나요? 물론 지금 당장의 고민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6 23:53
킬미 / 참, 역시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몹시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Commented by Sion at 2006/06/17 15:46
역시 저도 전혀 상관없는 얘기라면 영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또한 동감이 가는군요. 좀 더 기억하기 좋게 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 기억 자체를 미루게 만든달까 '없어질 것도 아닌데 나중에 시간날 때 보면 되지 뭐'라는 생각들;; 저도 가끔 그런 인터넷 북마크들이 쌓이곤 해서 찔립니다. 역시 이럴 때마다 프로젝트 2501의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너희들은 그 의미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가 생각납니다. 저는 세상 흐르는데로 살아서 그런지(영화를 거의 못봐서 그런지도;;) 순간의 이미지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역시 적어도 '평론'이란 이름을 붙이거나 능동적인 영화보기에 있어서는 새벗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_-)/
Commented by 『한군』 at 2006/06/19 18:03
글 다 읽고도 덧글 안달았는데, 이거 몹시 찔리는군요.
던지는 동작 같은 작은 동작 하나에서조차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아직은 많이 어렵네요. 아마 영화만 봤다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사무라이>를 보고 나서 부터는 작은 동작에서도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에서 위안을 삼아야겠군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9 22:27
『한군』 / 저도 존 포드 영화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하스미 시게히코의 이론은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저건 강의의 요약본에 불과하니 더욱. 개인적으로는 저 양반이 빨리 존 포드론을 책으로 내고, 그 책도 [오즈 야스지로]처럼 번역, 소개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동작을 본다는 것은 다시 말해 몸의 언어를 본다는 것이고, 그건 그 사람의 몸 전체에 녹아든 정서를 본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음성 언어는 정제해서 사용할 수 있지만 "행동 언어"를 다스리는 건 훨씬 어렵겠지요. 그런 면에서 영화 속에서 (혹은 존 포드의 경우처럼 같은 감독의 여러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행동들에 주목하는 건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6/19 22:33
『한군』 / 하스미 시게히코의 지적처럼 그런 몸의 언어는 무성영화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확실히 무성영화를 보다보면 좀 더 동작에 민감해지게 되는 듯 합니다. 버스터 키튼 영화는 처음 볼 때는 성룡을 능가하는 경탄스러운 아크로바틱 액션에 매료되지만 자꾸 보다보면 키튼이 음성언어가 박탈된 세계에서 표정과 몸짓으로만 정서를 전달하는 데에 아주 능숙한 훌륭한 연기자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최근의 예로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이별의 순간을 맞이한 에니스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선보이는 일련의 "동작"들이 있겠네요. 올해 본 연기 중에 가장 인상적인 연기였습니다. 아마 유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동작이 대사의 보조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대사를 뒤집어 엎는 중심 요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특히 생각나는 듯 해요.
Commented by 그린버그 at 2006/06/21 23:25
비평의 직무는 논증을 해내는 것이지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빠른 대답만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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