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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꼼에 처음 가입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영화에 대한 펼 생각 없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기분으로 꼼방에 갔다가 가입을 했고,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태도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더 적게, 더 대충. 그 때 가입 원서에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지, 영화를 달리 보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영화인지를 적는 난이 있었는데(아마 후자가 맞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매트릭스(The Matrix, 1999)]를 적었다.
난 [매트릭스]를 중학교 3학년 때 봤다. 그 무렵 나는 문체와 합성사진이 무지하게 웃기다는 이유로 (그리고 어쩐지 싫었던 이회창을 열심히 씹어준다는 이유로) [딴지 일보]의 팬이었는데, 어느 날 김어준 총수가 [매트릭스] 감상문 쓴 것을 보게 됐다. 영화 속의 성서적 인용, 즉 네오-예수 그리스토, 트리니티-막달라 마리아, 모피어스-세례 요한 등을 언급하며 영화의 내용이 예수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김어준 총수의 어투는 그런 해석이 맞거나 말거나 간에 그게 그럴 듯하게 맞아떨어지도록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었지만… 기독교 모태 신앙에, 명절마다 한 번씩 방영해주는 [벤허(Ben-Hur, 1959)]와 [십계(The Ten Commandments, 1956)]의 스펙터클에 매료당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고, [매트릭스]의 장면들이 멋지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던 중3에게 그 감상문은 일종의 계시였다. 우아, 내가 좋아하는 액션 영화에 이렇게 심오한 뜻이! 영화를 발로 본 자의 무지몽매함이여! 그게 몇 년 간 계속 이어져왔다. (김성곤 교수의 영향도 있었을까? 으음…) 요컨대 훌륭한 영화의 허구는 곧 현실의 반영 ․ 알레고리라는 생각. 물론 잘못된 생각은 아니고, 여전히 영화를 볼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원리다. 하지만……. 그렇게 [매트릭스]를 복음처럼 들고 씨네꼼에 가입했을 때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선배들(그리고 심지어 나를 강남에 따라가게 만든 친구 놈조차!)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어휘를 써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롱 쇼트, 컷, 딥 포커스……. 저게 다 뭐야? 잘 들어보니 뭔가 기술적이고 형식적인 요소인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다들 당연히 쓰는 어휘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두려웠고, 어쨌든 네오가 나와 함께 계시는데 무슨! 하며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 후에 술집에 갔을 때 술도 약한 놈이 뭘 좀 마셨는지 어쨌는지 당시 씨네꼼을 운영하던 회장 선배에게 물었다. 참고로 그 형은 씨네꼼 사람들 중에도 특히 영화 형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된 취미 중 하나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The Godfather, 1972)]를 자막 끄고 소리까지 끈 채로 화면만 보는 거였다. 질문은 이랬다. 아니, 영화를 볼 때 그 이야기, 그 의미를 읽어내려 해야지 자꾸 무슨 형식 이야기만 해서 뭘 하겠어요? 참으로 감사하게도, 형은 침착하게 답을 해줬다. (물론 이하는 내 기억 속에서 윤색/각색된 것이며, 내가 지금 형의 말을 받아들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 말도 맞긴 한데, 한 번 주위를 봐라. 요즘은 누구나 영화를 보고 누구나 영화를 얘기하는 시기다. 캠퍼스를 돌아다녀보면 알겠지만 어디서나 자기네 관심사에 맞게 영화를 택해 영화제를 여는 시기다. 영화 속에서 필요한 대로 의미를 찾아 읽는 건 모두가 한다. 하지만 그게 영화일까. 나는 영화에는 영화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고유의 특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모였다면 무엇보다도 영화를 영화이게 만드는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영화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과연 좋았을까?) 원래 사람이 변하는 건 하루 이틀 만에 계기 하나 가지고 되는 건 아니고, 그 말을 정말 진지하게 곱씹게 된 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이 블로그를 오랫동안 지켜보신 분들이라면 내가 [매트릭스]에 열광하던 초창기를 기억하시리라. 이 블로그는 어느 정도 내 영화 보기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지금의 내 견해와는 맞지 않는 글들도 꽤 되어 한 때 옛 글은 지울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것까지야) 하지만 아무튼 나는 그 이후로 이런저런 영화들을 더 많이 보면서 점차 변했다. 박찬욱, 브라이언 드 팔마, 마틴 스콜세지,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물론 완벽하게 그 말대로 영화에 주목하는 경지란 아직도 멀어 보이고, 사실 그것만이 길도 아니겠지만, 아무튼 지금의 나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 선배의 입장에 서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비슷한 반응을 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오늘날(오늘날만의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영화의 형식적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면 보통은 '평론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평론가적'이란 상당수의 관객들이 영화 평론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적대적인 시선을 반영한 어휘로, 풀어 말하자면 '남들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면서 영화의 감정을 즐기는 건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지 잘난 척 어려운 말 쓰면서 관객이 영화로부터 느끼는 감정과는 하등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 가지고 꼬투리 잡고 이해도 공감도 안 되게 영화를 해석/분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영화 관련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에 대한 거부감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나도 몇 개월 전 모 사이트 게시판의 어떤 회원이 '영화 공부를 해보려고 이런 저런 책도 읽고 극장가서 열심히 분석하며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저는 멍하게 있고 주변 관객들은 울고 있더군요. 그 순간 대체 내가 뭐하는 짓인가 하는 회의가 찾아왔습니다'라는 요지의 글을 올리자 여기저기서 '평론가적' 태도를 규탄하는 덧글이 달리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런 울분과 짜증 섞인 지적에 반박하기 힘든 평론가도 많아 보인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거야 일단은 평론가들의 문제니까 그렇다 치고, 정말로 영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게 지루하고 따분하고 쓸데없고 무엇보다도 영화 자체의 힘이나 감정과는 상관없는 학자연한 태도에 불과한 것일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나는 오히려 영화를 세밀히 뜯어볼수록 영화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고, 더 많이 웃거나 울 수 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배우고, 말한다. 영화에는 문학적, 미술적, 음악적, 연극적 요소 등이 뒤섞여있다는 얘기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마는 것은 (적어도 나는 이 이상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이 말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영화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말은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연극 등을 강조하고 '뒤섞임'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영화는 다양한 요소가 서로 반응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화합물이 아니라 그저 다양한 요소가 한데 모여 있을 뿐인 혼합물로 인식된다. 이 '교육적 전통'의 막강한 영향력은 숱한 영화 감상문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영화 감상문의 형태 : '줄거리와 대사는 기발합니다. 화면은 예쁘더군요. 음악은 O.S.T를 사고 싶을 정도였어요. 이 배우는 연기 변신이라 할 만큼 예전과 다른 연기를 했는데 잘 하더라고요.' 요컨대 이는 영화라는 '혼합물'에서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연극을 마치 흙탕물을 거름종이에 통과시켜 흙과 물로 분리하듯 하나씩 구분지어 논하는 행위이며, 여기에 영화 자체의 위치는 없다. 영화를 다른 예술들의 합이 아니라 영화 자체로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럼으로써 개별 영화의 핵심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뒤섞이면서 혼자 있을 때는 전해주지 못하던 감각을 전하는가 하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개의 요소는 떼어놓고 뭉뚱그려 얘기하는 것으로 끝낼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식을 통해 조합되는가를 보고 들어야 한다. 기가 막힌 대화 장면에서 대사의 맛깔스러움뿐만 아니라 대사를 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화면에 어떤 크기로, 어떤 순서로, 어떤 움직임 안에서, 어떤 소리를 배경으로 담기는지 까지를 인지하고자 해야 한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나는 지금까지 두 종류의 반론을 들어왔다. 먼저, 그 모든 영화적 형식이 관객의 특정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의도되었다면 그런 세밀한(?) 부분을 인지하면서 보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관객은 비슷한 감흥을 얻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채 형식적인 측면에 익숙한 사람만이 장면의 핵심을 인지할 수 있다면 그건 연출의 힘이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의견. 다른 하나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런 분석적 태도는 관객이 영화의 내용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 이 두 반론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낯선 행위인지, 동시에 그것이 낯설다는 사실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서 케케묵고 어이없는, 우리의 영화에 대한 '교육' 한 가지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수동적인 예술이라고 배운다. 논리는 무척 간단하다. 문자 언어로만 이뤄진 문학은 그 글이 지시하는 바를 상상하게끔 하지만 영화는(여기서 만화 애호가 여러분들께서도 함께 울분을 토하실 수 있겠다) 직접 보여주기 때문에 상상의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누가 한 소리인지는 몰라도 이 대책 없는 논리가 문화계에 끼친 악영향이 실로 막대하니, 발언자께서는 지금이라도 반성하며 살고 계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예술 작품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이 고작해야 '눈앞에 없는 걸 상상으로 그려내는 것'뿐이라고 말할 참인가? 대체 어째서 같은 논리가 미술에 적용되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맞다. 영화는 보여준다. 하지만 그 보여주는 방식이 우리가 실생활에서 주변을 바라보는 방식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은 모양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거리가 조정되고, 무엇이 보이고 보이지 않을지 결정되고, 어느 순서와 어떤 속도로 보일 지가 정해지고, 무엇을 듣고 듣지 않을지 선택되어 있으며 때때로 시간과 공간의 구조조차 뒤틀려 있는, 조합된 체계로서의 시청각 이미지와 우리가 보고 듣는 일상의 모습이 동일하다고? 다르다. 너무나 다르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는 선험적으로 습득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언어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 그럼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새로운 언어─100년 조금 더 된 언어를 배우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언어로 쓰인 예술 작품을 받아들이는 폭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어학 능력'에 따라 차이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 아닐까? 음악도 미술도 연극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따로 있거니와, 영화만이 마치 어느 누구나 아무런 이해 없이도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예술처럼 취급되는 것이 이 예술 특유의 '대중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쨌거나 그건 그리 옳은 생각이 못된다. 세상에 아무 노력도 않고 널브러져 있는 감상자 앞에서 본색을 몽땅 보여줄 예술은 없을 터이고, 만약 그토록 감상자에게 수동적인 입장을 바라는 예술이 있다면 그게 그리 잘된 예술일 것 같지도 않다. (공교육 국어 시간에 나오는 "능동적 독서"라는 표현을 좀 더 주의 깊게 안내했더라면…) 이 정도면 두 반론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한 것 같지만 두 번째 문제─영화의 '내용'에 몰두할 수 없다는─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장 쉬운 대답은 모든 언어 학습자들이 지겹게 듣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대답이다 : 언어가 그렇게 쉽게 익혀지나. 하지만 이런 재수 없는 진실 말고 다른 말로 해보자. 실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서 이야기한다. 이런 이분법은 말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큰 오해를 부르기 쉽다. 이를테면 그릇의 비유. 여기서 그릇을 형식으로, 그 안에 담긴 것을 내용으로 비유하는 것의 오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건 잘못된 비유다. 그릇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일 텐데 안에 있는 다른 대상을 내용으로 비유하면 되나. 그릇의 내용은 '물건을 담는다'이다. (다른 내용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은 이렇게 제한해두자) 형식은 그릇을 만든 재로, 방식, 그 결과로 나타난 형상 등일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과 형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모양(형식)에 따라 그릇은 꽃병일 수도, 접시일 수도 있다. 혹은 그 역도 가능하다. 요약하자면, 형식은 곧 내용이다.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느냐는 곧 그 표현 대상의 의미가 된다. 배우가 연기하는 방식에 따라 똑같은 대사가 다른 뉘앙스, 다른 감정을 이끌어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을 터. 영화 속 쇼트의 크기, 각도, 지속시간, 움직임, 순서, 취사선택된 소리, 소리의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 등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그러니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테디캠은 알랭 들롱의 포커페이스만큼 섹시하다고. 샘 페킨파의 교차 편집은 이소룡의 옆차기만큼 파괴적이라고. 자끄 따띠의 효과음들은 짐 캐리의 안면 개그만큼 웃기다고. 그리고 그 모두가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며 그 모두가 재치 있는 대사와 배우의 행동과 뒤통수치는 반전만큼이나 흥미롭고 주목할 만하다고.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국 영화는 체계이고 관계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요소들을 모두 보려 애쓰는 것이며 그들을 공동체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 공동체가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영화는 달라붙을 수 없는 것들을 뭉뚱그려 묶어둔 뒤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하나씩 빼먹으면 그만인 과자 종합 선물 세트가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된다. 하지만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렇게 하는 순간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방금 골라 빼먹은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것을. 혹은 내가 그 요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영화 때문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 내가 곧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 우마 서먼을 좋아합니까, [킬 빌 Vol.1(Kill Bill Vol.1, 2003)]의 우마 서먼을 좋아합니까?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를 영화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영화를 영화로서 대접해주고 있는가? 이건 말하자면, 영화에 대한 예의 갖추기다. 나와 같은 종도 모르겠는데 나와 다른 종,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대상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마는, 결국 또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양을 갖추고 기다리며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영화들에게 예의를 다해보고 싶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반응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해왔고, 하고 있고, 할 것이다. 그에 대한 만고불변의 이유 :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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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한 글 잘 읽었습니다..
by kinoeyes at 08/19 말씀하신대로 류승완 감.. by sabbath at 08/17 참 말할 거리가 많은 영.. by 파인로 at 08/17 그쵸. 사실상 모든 프랑.. by sabbath at 08/16 아, 그것은… 저도 무.. by sabbath at 08/16 저도 그 글을 읽어보았.. by sabbath at 08/16 제작사 외유내강 측의 .. by sabbath at 08/16 소식 고맙습니다! 포스터.. by sabbath at 08/16 가끔은 너무 만든 사람에.. by sabbath at 08/16 먼저 안 보신 분들께는 .. by sabbath at 08/16 저도 만주 벌판 액션이 참.. by sabbath at 08/16 [다찌마와 리] 속편 또.. by sabbath at 08/16 오오, 드디어 올리셨군.. by Sion at 08/16 드팔마를 떠올리는 장면.. by 다찌대박 at 08/16 저는 그놈의 잘생겼다!가.. by 은혈의륜 at 08/16 최근 등록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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