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무맹랑한' 장르 속의 괴물들이 '애들이나 좋아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권리를 회복하기 시작한 데에는 필시 실제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전까지 끔찍한 것, 배척해야 할 것, '우리'를 해하려 하고, '우리'가 힘을 합쳐 몰아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던 존재들이 여성, 흑인, 동성애자 등 실제로 인류 역사 속에서 편견 속에 희생당해왔던 대상들과 동일시되는 건 당연한 일이거니와, 인간의 편견에 대한 인식이 보다 널리 퍼져감에 따라서 그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 속의 괴물들도 더 이상 흉포한 가해자의 위치에만 머무르지 않은 채 오히려 다수의 시선 속에 핍박당한 피해자로서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이 등장했을 때 한강을 뒤흔드는 괴물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걸 점점 더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가 됐달까.
샬레인 해리스의 남부 뱀파이어 미스터리 시리즈, 혹은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는 그와 같은 괴물에 대한 시각 변화를 노골적으로 반영한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뱀파이어는 더 이상 미지의 괴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인된 '소수자'이고, 그들은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편견, 오해, 몰이해 속에 살아간다. 관으로부터 '커밍 아웃' 했다고나 할까. 시리즈 첫 권인 [어두워지면 일어나라]에서, 루이지애나 주의 작은 마을 본템프스에 사는 주인공 수키 스택하우스도 마침내 그런 소수자로서의 뱀파이어와 마주치게 된다. 오랫동안 뱀파이어를 만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인간들과 섞여 살며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온 뱀파이어 빌이 그 피를 갈취하고자(!)하는 인간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그를 구해내면서 친분을 쌓기 시작해 이내 사랑에 빠진다. 물론 그 사랑의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뱀파이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건 당연한 수순. 그런데 하필 빌이 나타난 시기에 맞춰 뱀파이어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몇 십 페이지도 못 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수키?」 「시간이 필요해요.」 「언제까지?」 「우리 사랑이 정신적 고통을 감당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결심이 설 때까지요.」 「수키, 만약 당신이 얼마나 독특한 맛인지, 내가 얼마나 당신을 보고하고 싶어 하는지를 안다면…….」 같은 상황을 우리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혹시 뱀파이어 여러분들께서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작은 사과의 말씀 드리는 바이다) 소수자들로 치환한다면 이 설정이 지니고 있는 험악한 분위기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작가 샬레인 해리스가 이런 설정을 정말 진지하게 담아낼 생각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종종 예상한 것 이상으로 폭력적인 상황이 제시되기도 하고, 그 결과 사람들도 제법 많이 죽어나가기는 하지만 그런 갈등 요소가 두 주인공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중에선 뱀파이어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집단 린치 수준으로 번지는 상황까지 발생하지만 그런 주변 환경의 험악함이 빌에게 직접적으로 가하는 신체적/정신적 상처는 거의 없으며, 빌 또한 그런 편견에 상처받기에는 너무 강인(하고 섹시)하다. 한편 수키 또한 자신의 초능력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욕 외에는) 달리 억압당한 부분이 없어 보일 정도로 적극적이고 활기찬 모습을 유지한다(지독한 비극과 우울조차도 행동으로 극복할 정도다). 비록 "정상"이나 "장애", 혹은 "주류" 같은 의미심장한 어휘들이 작품 곳곳에서 출몰하기는 하지만 그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인물들은 소수자를 핍박하는 인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주동인물들이며, 그들은 그 문제에 의해 큰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사회적 편견을 해소해 나가고자 하는 운동가적 기질도 보이지 않으니, 어휘들은 그저 어휘로서 흘러갈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며 '주류'가 되고 싶어 하는 빌의 소망이나, 타인의 마음을 들을 수 있기에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수키의 '장애'는 모두 이 두 인물을 엮어서 로맨스 소설을 쓰기 위한 장치 이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정상/비정상 혹은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 문제를 인지하고 그런 문제에 윤리적으로 합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이 정치적 인식을 상업적으로 패션화했다고 말(하고 그런 태도를 규탄)해야 하는 걸까? 글쎄, 샬레인 해리스에게 그리 가혹하게 대하고픈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런 논쟁적 소재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일 텐데, [어두워지면 일어나라]는 귀엽기도 하고 지지부진하기도 한 사랑 싸움과 키스와 섹스를 이야기하고 싶어 할 뿐, 소수자로서 뱀파이어의 입지를 심도 있게 고찰하며 소수자들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척 하는 기만적인 태도를 자랑스레 내세우지는 않는다. 앞서 수키와 빌을 괴롭히는 장애물들이 보기만큼 그들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는데, 바꿔 말하자면 그건 독자들이 그들의 고난이나 행복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유가 두 인물이 지닌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둘이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기 때문일 뿐이란 이야기다. 이 작품은 진지한 척, 고민하는 척, 무거운 무게를 짊어진 척 하지 않고 자신이 이런 소재를 이용해서 하고 싶은 바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뱀파이어는 굶주려 있었다. 내가 듣기로 일본인이 개발해 낸 합성 혈액은 영양 면에선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뱀파이어의 굶주림을 정말로 채워 줄 순 없었다. 그것이 바로 때때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였다(뱀파이어는 피비린내 나는 살인 사건을 이렇게 포장해 불렀다). 그리고 여기 데니즈 래트레이가 자기 목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대고 있었다……. 〈쌍년〉. '진지한' 독자라면 그런 가벼운 태도 자체가 독자들에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정치적 오해'를 야기하고 있다고 분개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계몽적이거나 혹은 무지한 독자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모든 장르적 요소에 대해 올바르고 진지한 성찰을 가득 담은 작품을 요구하는 편이 더 어리석고 몹쓸 짓으로 느껴진다. 장르적 요소들에서 정치적 함의를 찾아내는 건 좋은 일이지만 장르 도구를 정치 도구로 오해하면서 본말을 전도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어두워지면 일어나라]에는 합성혈액을 사 마시는 뱀파이어들과, 그들을 추종하는(비밀종교의 교도 같은 음침한 게 아니라 좀 광적인 팬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송곳니 중독자들과, 꽤 당당하게 사는 독심술사와, 독자들이 혐오할 정도로 사악해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사랑할 만큼 착하지도 않은 '좋은 이웃들'과, 소소한 유머와, 전체 톤에 비해 다소 음침한 폭력과, 애드거 앨런 포 상 같은 건 절대 못 주겠지만 적어도 결말을 궁금해 하게 할 정도의 미스터리 등이 큰 야심 없이 즐겁게 섞여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방의 전등을 끄는 걸로 애정 장면을 끝맺지는 않을 정도로는 음란하지만 남녀의 성기를 그 소유자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나 인칭 대명사로 바꿔 표현할 정도로는 정숙한 로맨스가 있다. 이 정도면 장르에 익숙하고 마음씨가 말랑말랑한 독자들이 즐기기엔 적당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시리즈가 몇 편 더 나왔는데 갈수록 재미있어진다고 하니(출판사 말이니 어디까지 믿을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일단은 믿고 싶다) 이미 해볼 건 다 해본 것 같은 이 작품의 설정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리라 믿는다. 「내가 그리웠나요?」 내 반바지 단추를 끄르고 벗기며 빌이 물었다. 「네.」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빌은 껄껄 웃더니 내 나이키 운동화 끈을 끄르기 위해 무릎을 굽히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뭐가 가장 그리웠나요, 수키?」 덧. 번역계의 욘사마 최용준 님은 갈수록 더 마음에 든다. 코니 윌리스-어슐러 K. 르 귄-샬레인 해리스-세라 워터스로 이어지는 여성 장르 작가들의 목록을 통해 점점 더 자신의 번역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느낌. 로저 젤라즈니 번역을 전담한 탓에 이제는 뭘 번역해도 남성(쌈마이) 액션 SF 전문 번역가로 인식돼버린(테드 창,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등에게 묵념) 김상훈 님과 함께 장르 문학 번역계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나 할까. [어두워지면 일어나라] 역시 작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 채 역자 이름만 믿고 읽었다.
|
알림
카테고리
최근 등록된 덧글
꼼꼼한 글 잘 읽었습니다..
by kinoeyes at 08/19 말씀하신대로 류승완 감.. by sabbath at 08/17 참 말할 거리가 많은 영.. by 파인로 at 08/17 그쵸. 사실상 모든 프랑.. by sabbath at 08/16 아, 그것은… 저도 무.. by sabbath at 08/16 저도 그 글을 읽어보았.. by sabbath at 08/16 제작사 외유내강 측의 .. by sabbath at 08/16 소식 고맙습니다! 포스터.. by sabbath at 08/16 가끔은 너무 만든 사람에.. by sabbath at 08/16 먼저 안 보신 분들께는 .. by sabbath at 08/16 저도 만주 벌판 액션이 참.. by sabbath at 08/16 [다찌마와 리] 속편 또.. by sabbath at 08/16 오오, 드디어 올리셨군.. by Sion at 08/16 드팔마를 떠올리는 장면.. by 다찌대박 at 08/16 저는 그놈의 잘생겼다!가.. by 은혈의륜 at 08/16 최근 등록된 트랙백
이전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