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장 피에르 멜빌을 떠올리며…
 며칠 전에 DVDBeaver의 리뷰들을 습관적으로 둘러보다가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L'Armee des ombres, 1969)] DVD 리뷰가 올라왔기에 '이게 나왔단 말이야?!'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밀고자(Le Doulos, 1963)], [두 번째 숨결(Le Deuxieme souffle, 1966)]과 더불어 가장 보고 싶은 멜빌의 영화고, 올해 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 계획을 밝혔다가 사정상(무슨 사정인지야 뭐…) 취소돼 버린 작품이다. 올 봄에 로저 에버트가 "위대한 영화" 목록에 올린 것도, 별 상관은 없지만 아무튼 보고 싶다는 데에는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아, 드디어 DVD로라도 볼 수 있게 되는 걸까?"했는데 다시 보니 영국판 DVD. 그런데 좌절 후 마음을 추스르고 리뷰를 읽다가…

 스크린 샷들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갑자기 환기되는 장 피에르 멜빌에 대한 애정! 아,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지. 반 년 넘게 그의 영화를 보지 않고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과묵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모자 쓴 남자들. 청회색의, 칼라 필름으로 만든 흑백 세계, 군더더기 없이 관능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세상에 대한 희망은 하나도 없지만 불평 없이 침묵한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면서 자존은 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 거기에 정말 저항할 방도가 없었지. 자기 세계 안에서 완고하게 소멸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금연자(金燕子, 1968)], [옛날 옛적 서부에서(C'era una volta il west, 1968)], 그리고 [포인트 블랭크(Point Blank, 1967)]로 [사무라이Le Samouraï, 1967)]를 대체하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마치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주려는 듯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으로부터 2년이 지난 올해 12월, "알랭 들롱: 신화로의 귀환"이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상영작 전부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멜빌의 영화를 최소 두 편은 볼 수 있다. [사무라이]와 [붉은 원(Le Cercle Rouge, 1970)]. 알랭 들롱이 상영회의 핵심이니 멜빌의 유작 [형사(Un Flic, 1972)]도 기대해 본다. 비록 [그림자 군단]을 볼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렇게 갑자기 다시 멜빌의 프랑스를 떠올리며 그 거리를 거닐어보고 싶은 마음에 들뜨게 되었다. 아, 멜빌!
["할 말 없나?" / "총 겨눈 사람과는 말하지 않아." / "원칙인가?" / "습관이지."]



 덧 하나. Sion 님께서 감사하게도 지난 4월에 있었던 [사무라이] 세미나에 대한 감상을 올려주셨기에 문득 생각나서 해보는 이야기다.


 덧 둘. DVD 빌려 가신─빌려 드렸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만─J모 님, 반납요망이라는 이야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덧 셋. 근데 크라이테리언은 보고만 있으려나. [그림자 군단]을 비롯해서 꼭 누아르가 아니더라도 멜빌 영화는 몇 편 더 내주면 좋겠는데. BFI는 [그림자 군단] 외에도 [레옹 모렝 신부(Leon Morin, Pretre, 1961)]와 [밀고자]도 출시했다고! 코멘터리에 영문 자막까지 달린 저 영국판 DVD, TV로는 못 보더라도 확 사버리고 싶다. 우리집 TV는 왜 PAL을 지원하지 않는단 말인가.


 덧 넷. 이 글과 큰 상관은 없겠지만, 이제 하루 남은 서울아트시네마의 "자크 베케르 특별전"에 대해 언급해두고 싶다. 이거 보려다가 "조셉 맨케비츠 특별전" 때문에 포기했는데… 본 게 없으니 달리 말할 건 없고, 다만 어제 서울아트시네마 자유게시판에 한 관객의 감동적인 글이 올라와서 소개한다. 어찌나 보고 싶던지. 친구 하나는 이 글을 읽고 어젯밤에 아트시네마로 달려갔다. (재미있었니?) 언젠가 DVD로라도 꼭 봐야지. 그러고보면 로베르 브레송도 그렇고 멜빌도 그렇고 자끄 따띠도 그렇고, 나는 누벨바그 직전의 프랑스 감독들과 뭔가 맞는 게 있나보다.
by sabbath | 2006/11/22 16:50 | 영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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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진흙 at 2006/11/22 23:31
그럼, 재미있었지!! 나 사실 베케르 특별전은 안 가고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충동적으로 달려가길 참 잘했다고 생각해. 남은 네 편을 다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 내일 [황금투구]를 볼 예정이고 기왕이면 그 전에 5시 50분 상영 [구멍]도 꼭 보고 싶은데 (영화 설명만 읽으면 이 영화가 가장 내 마음에 들 것 같은 예감) 발표 준비 모임 때문에 시간이 어떨지 간당간당해서 똥줄이 탄다 얘. 염장 지르지 말라길래 조용히 있었더니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이 행각은 무엇이뇨?

그나저나, 사실 며칠 전에 [사무라이]를 405호에서 혼자 봤는데, 지친 마음 좀 달래보자 싶어서 그냥 본 영화에 와락 사로잡혀버렸어. 마침 알랭 들롱 특별전이 기말 끝나는 시점인데다 융융이가 그 때쯤 밖으로 나올 공산이 커서, [사무라이]를 '영화관에서 필름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다시 볼 기회를 아주 기대하고 있는 중이야. 근데 [형사]도 하는 게 확실하니? 아트시네마 게시판에는 '이번 회고전에서 <레오파드>, <사무라이>, <암흑가의 세 사람>, <고독한 추적> 등 그의 대표작들을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만 나와 있는데.
Commented by sabbath at 2006/11/23 00:12
진흙 /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을 늘릴 수만 있다면 나 하나 무덤에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랴… 는 아니고, 관심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하나라도 더 들어둬야지. 나는 제목만 들어도 죽이는 [현금에 손대지 마라]를 특히 보고 싶어. DVD로는 [황금 투구], [현금에 손대지 마라], [구멍]을 볼 수 있구나. 언젠가는!

알랭 들롱이 모자 만지는 걸 스크린으로 본다는 거,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때 풋내기였던 나는 [붉은 원]과 [형사]만 봤지. 젠장!)

[형사] 한다는 이야기는 없었고, 그냥 내가 기대한다는 얘기지. 최근 서울아트시네마 경향에 비춰 볼 때 이례적으로(사실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문화원 쪽에서 나서서 하는 거니까 그렇겠지만) 길게 하는 상영회니까 좀 여러 편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게다가 [형사]는 멜빌 연출작 중 [사무라이], [붉은 원]과 묶여서 '알랭 들롱 3부작'으로 불리다보니 어쩐지 빠지면 섭섭할 것 같고; (사실 들롱이 중심에 선 영화는 아니지만 들롱 핑계대고 [표범]도 상영하는 판에 뭐 어때. 그러고 보면 [붉은 원]도 정말 중요한 인물은 이브 몽땅이고…)

그나저나 [고독한 추적]이 뭔가 하고 검색해 보니 조셉 로지 감독의 [클라인 씨]였구나. 무지 보고 싶었는데! 앗싸!

그럼 일단 알려진 상영작은 [태양은 가득히], [표범(레오파드)], [사무라이], [붉은 원(암흑가의 세 사람)], [클라인 씨(고독한 추적)] 다섯 편인가. 또 뭐가 있을까… [로코와 그 형제들], [일식], [지하실의 멜로디], [친구여 안녕(아듀 라미)]… 아악,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절세 미남 배우도 영화적으로 흥미진진한 필모그래피를 구축할 수 있다는 증인인가.

그나저나 [사무라이]가 마음에 들었다니, 뜻밖이면서도 기뻐 ^o^ 나는 항상 '나 같은 쌈마이 취향(나는 쌈마이라는 표현을 너무 마음대로 쓰고 있는 듯;)은 다른 사람에게는 안 맞아'라는 피해망상을 짊어지고 살고 있거든 -)y~
Commented by 『한군』 at 2006/11/23 14:16
[현금에 손대지 마라] 재밌게 봤어요. 우정과 의리 라는 홍콩 느와르 물의 주 소재를 프랑스에서 다루는 것을 보는것도 재밌더라고요. 물론 프랑스인 만큼 '열혈'보다는 '품위'라는 느낌이랄까요. -_-;;
Commented by 진흙 at 2006/11/23 16:52
『한군』님 화요일 저녁에 보셨나요? 만약 그랬다면 저와 함께 보셨겠네요 ^^;; 점잖고 우아해서 더 잔인하고 비열했던 영화였어요. 사실 전 주인공이 리토와의 의리를 안 지키고 안젤로의 제안을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앗 스포일러?!) 혹시 그 주인공의 테마곡 곡명 아시나요? 찾아 듣고 싶어요.
Commented by 진흙 at 2006/11/23 16:53
그나저나 난 발표모임이 간당간당해서 [구멍]을 놓치고 있어 -_- 대학생도 시간이 늘 많은 건 아니라니까.
Commented by sabbath at 2006/11/23 17:31
『한군』 / 과묵하고 티 내지 않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분위기,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꼭 봐야겠네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6/11/23 17:45
진흙 / 내가 알 리는 없지만 아마존에서 영화 원제인 "Touchez pas au grisbi"로 검색해 보니 프랑스 누아르 영화들에 나오는 음악 서른 곡을 모아놓은 음반이 나오는데 첫 번째 트랙이 [현금에 손대지 마라] 중 "Le Grisbi"라는 곡이야. 네가 말한 곡이 하모니카 곡이라면 이게 맞을 것 같다.

상당히 유명한 곡인지([현금에 손대지 마라]는 우리나라 개봉도 했고, 제목 때문에 끊임없이 패러디되기도 했나봐) 국내 웹에서도 검색하니까 이런저런 페이지들이 나와. 특히 노부오 토쿠나가라는 일본 하모니카 연주자의 음반 중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음반이 있는데 그 중 1번 디스크의 9번 트랙이 바로 이 "Le Grisbi"구나.
Commented by 『한군』 at 2006/11/23 18:47
진흙//아쉽게도 전 어제 봤답니다. 그리고 저도 스토리가 그렇게 갈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을 못했어요. 특히 맨 마지막의 장면은 더욱 그러하고요.
Commented by 진흙 at 2006/11/25 01:59
그 노래가 맞는지 안 맞는지 벌써부터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고마워 ^^
Commented by sabbath at 2007/05/19 19:58
오늘 문득 [사무라이]를 다시 보고 이 글을 읽게 됐는데, 이제 보니 본문에 언급한,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 게시판에 "자크 베케르 특별전"에 관한 감동적인 글을 쓴 사람은…

…서울아트시네마 관련자였음 OTL (네이버 서울아트시네마 카페 가시는 분들은 아실 듯)

처절한 낚시에 감동의 눈물이 ㅠㅠ
Commented by sabbath at 2007/05/19 19:59
아, 근데 정말 베케르 영화 보고 싶다. 돈 생기면 크라이테리언을 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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