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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랄타리키라고 불린 존재는 정말로 악마입니까?" 탁이 물었다. "그렇다─ 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야마가 말했다. "만약 네가 말하는 〈악마〉라는 것이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초자연적인 존재이고, 강대한 힘, 긴 수명, 일시적이라면 거의 어떤 것으로도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면─ 대답은 〈아니다〉이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마의 정의지만, 이들 정의 중 한가지만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 그럼 무엇이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들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정의는 모두 맞는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초자연적이든 아니든 간에 실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들이 유해하고, 강대한 힘과 긴 수명을 가졌으며 마음대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아니다. 거기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것은 미지(未知)와 불가지(不可知)의 차이, 과학과 공상의 차이인 것이다─ 이것은 본질의 문제이다. 나침반의 네 방향이 논리, 지식, 지혜, 그리고 미지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하자. 어떤 자들은 마지막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다른 자들은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 이 방향을 보고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다른 세 방향을 시야에서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미지의 존재에 복종할지도 모르지만, 불가지한 것에는 절대로 복종하지 않는다. 이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자는 성인 아니면 바보이다. 그 어느쪽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주요 작품들이 제법 번역 소개되고 팬들도 어느 정도 생긴 오늘날 익히 알려진 것처럼, 로저 젤라즈니는 곧잘 신화의 내용을 잔뜩 끌어와 그 형상을 현대적인(?) 인물들에게 부여하고 그런 인물들의 사회 속에서 온갖 병장기와 마법이 난무하는 남성 중심적 서사 액션을 펼쳐내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그렇듯 팬터지와 SF의 경계 어딘가에서 서성거리면서 열성적인 장르론자들에게는 장르의 영역에 대한 논의("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의 발단을, 탐구심 많은 장르 독자들에게는 다른 장르를 들춰보고 싶게 만드는 다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신들의 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힌두 신화를 틀로 삼은 이 작품에서는 브라흐만, 칼리, 인드라, 아그니, 야마, 쿠베라 등등 힌두 신화 속 신들의 이름을 따온 인물들이 등장하여 화염과 벼락, 환영(幻影)과 죽음 등을 무기로 삼아 휘두르며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우주선, 비행체, 유전자 공학 따위가 주요 소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호한 위치가 던지는 화두─ 이것은 팬터지인가, SF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혹은 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내려는 노력은 잠시 접어두고), [신들의 사회]는 〈죽음의 신〉 야마-다르마의 말을 빌리자면 분명 불가지가 아니라 미지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젤라즈니는 여기서 언뜻 보기에 초자연적, 환상적으로 보이는 많은 요소들을 끌어와 펼쳐내지만 그 요소들이 신화적인 후광을 띠고 있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계속해서 구체성을 부여하면서 그것들을 속세로 내려오게 하려는 듯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준수한 SF들이 곧잘 취하곤 하는 흐름에 역행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준수한 SF들이 곧잘 취하곤 하는 흐름"이라는 말을 하면서 제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어슐러 K. 르 귄의 [로캐넌의 세계(Rocannon's World)], 그렉 이건의 [쿼런틴(Quarantine)] 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런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큰 기쁨 중 하나는 구체적 기반(과학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을 지닌 세계 속에서 그 세계의 법칙에 따라 저돌적으로 전개되던 이야기/사고가 어느 순간 '도약'하면서 신화/경이/환상의 영역에 들어감으로써 정밀한 세계관을 따라가던 독자의 사고가 함께 도약하여 미처 생각지 못했던 너른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는 쾌감입니다. 아마 넓은 의미에서의 외삽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방점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에 찍고 싶은데, 받아들임직한 세계관 속에서 사고를 전개하다가 그 사고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마치 나는 분명히 서해안 고속도로만 성실히 쭉 타고 갔는데 시나브로 신의주에 와 있어서 경악하게 되는 것과 같은 충격이야말로 이런 즐거움의 묘미이기 때문입니다. 젤라즈니는 그 흐름을 역으로 타고 갑니다. 가히 따를 자가 없어 보이는 문체로 표현된 세상과 사건들은 신화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신비롭고 환상적이며 여타의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아, 이건 이런 거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심상들을 뽐냅니다. 이를테면─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의 승원에서 죽음의 신이 기도를 올리고, 그 기도는 빽빽한 구름 사이를 관통하여 그 뒤편에 펼쳐진 찬란한 금빛 하늘에 가 닿습니다. 그리고 이미 열반에 들어 거기서 우주적인 정신체로 흘러 다니던 옛 위대한 영혼이 그 기도에 응답하여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새로운 육신을 통해 현신합니다. 혹은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속세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던 정신적 지도자가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 한 신들에 의해 내몰림 당한 끝에 옛날 옛적에 봉인되었던 악마를 풀어내어 협상을 하려하고, 악마는 협상을 하다가 빈틈을 보아 그 인물의 육신을 빼앗은 뒤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던 지상의 탐욕을 추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정신적 지도자를 쫓아온 불의 신이 등장하여 강렬한 화염을 내뿜고, 그 화염에 의해 악마가 패퇴합니다. [신들의 사회]에는 거의 무슨 설화 수준의 이런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가히 신화 액션 로망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그 줄기에 세세한 대사와 묘사 등을 곁들인다면 그 정도로 흥미진진한 장르 팬터지가 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았다. 들판의 풀은 아직도 밤이슬에 젖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공기는 차가웠고, 땅은 아직도 쉽게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온통 회색, 녹색, 황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굽이쳐 흐르는 베드라의 수면에서는 양쪽 강변에 도열한 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모든 날은 각각 세계의 역사를 되풀이한다고 한다. 그것은 어둠과 차가움 속에서 태어난 혼란스런 빛과 어렴풋한 따뜻함으로 시작되고, 오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는 의식(意識)이 그 눈을 깜빡거린다. 각성시의 사고(思考)는 비논리적이며 분리된 감정의 잡다한 혼합물. 이 모든 것이 정오의 정상을 향해 질주하며, 박명(薄明)의 완만하고 통절한 쇠퇴기를 지나 황혼의 신비적 환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는 것은 엔트로피의 종말, 또 다른 밤. 그날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젤라즈니는 여기다 그럴 듯한 디테일을 붙이기는 붙이되 곧잘 그 원형적/신화적 박력을 까먹으려 드는 듯한 세부 설정을 붙여 나갑니다. 가만 놔두고 신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는 액션 소설로 만드는 대신, 그 신들이란 사실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외계(아마도 지구)에서 우주선을 타고 이민 온 이주자들이며 약물, 최면술, 명상, 신경외과적 방법 등을 통해 돌연변이 능력을 유지 개발한 뒤 토착 생명체를 몰아내고 힌두 신화를 빌려 세상의 통치 체계를 세워 스스로 신이 된 자들이라는 이야기를 가득 풀어내는 식인데, 세부적인 디테일("일단 내가 〈상〉을 띠고, 사신이 내게 준 강궁을 잡으면, 나는 몇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움직이는 표적을 향해 열추적식(熱追跡式) 화살을 날려보내 벼락치듯이 그걸 죽일 수 있어.")은 물론이고 이야기의 전체 구조에 이르기까지 이런 탈신화적(?) 성격의 설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역행'을 통해 가장 부각되는 것은 인물입니다. [신들의 사회]에 등장하는 모든 중심인물들은 신 혹은 그에 준하는 품격과 광휘를 두르고 나타나 온갖 신화적인 행위를 행하지만, 그 행위들이 서사시나 설화에서 나옴직한 간단명료한 전개 대신 세세한 대사와 사고, 설명을 거쳐 가는 동안 그들의 "〈상(相)〉" 은 점점 더 벗겨져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이야기하며 단순히 '희로애락을 지닌 인간적인 신' 운운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신이라기보다는 신의 능력을 지닌 인간에 가깝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작품 전체의 탈신화적 배경 덕에 이런 식의 인물들이 활약할 수 있는 판이 깔려 있는데, 거기에 더하여 부르고뉴 와인이라든지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강〉 같은 사소하고 구체적인 소재들이 틈틈이 끼어들면서 이 신들의 인성(人性)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반쯤은 그냥 재미나게 웃자고 끼워 넣었음직한 젤라즈니의 '현대적'인 유머도 작품 속의 신화적인 분위기와 균열을 일으키면서 신성(神性)을 슬쩍슬쩍 긁어 벗겨내는 데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신들의 사회]뿐만 아니라 젤라즈니의 많은 작품들이 추구하는 바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역자 김상훈의 역어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만 합니다. 그는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종종 외국어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적어도 젤라즈니의 작품에서는 적절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마담"이나 "비즈니스" 같은 어휘를 고대 신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인물들이 언뜻언뜻 쓰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그들이 진짜 신화 속의 신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기를 추구한 인간의 무리임을 은연중에 강조하는데, 젤라즈니 식 초인들의 성품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실로 잘 어울립니다) 그 결과,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신과 악마가 뒤엉켜 쌈박질 하는 이야기, 엄청 센 놈들이 지들끼리 재미나게 싸우는 이야기로 보일 법한 내용이 어느 정도 인간적 품위를 머금게 됩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분투가 단지 현란한 액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판단을 결정하는데 밑받침이 되는 이상 혹은 이념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지며, 그 비중이 결코 알량하게 '우리는 이런 고민도 하고 삽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액션!'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특히 4장에서 라카샤[羅刹]의 두령 타라카와 만난 샘이 육신을 빼앗긴 뒤 온갖 타락을 체험하면서 발견하는 내면에 대한 성찰, 혹은 신들에 대한 적대 행위에 대한 고찰은 이 인물이 단순무식하게 확고한 일면만을 지니고 무작정 싸우는 액션 영웅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이루지 못한 채 변화를 찾아 버둥거리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전해줍니다. 역자 해설에서도 지적되는 것처럼 [신들의 사회]에는 여러 층위에서 이원적인 대립 구도가 나타나고, 그 구도의 어느 한쪽에 몸을 얹은 채 투쟁하는 이들의 갈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샘의 고민과 결정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중 어느 쪽도 완전히 옳은 경우는 없으며(브라흐만과 샘이 나누는 신권주의/촉진주의에 대한 논쟁이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높고 완전무결한 이상, 한 번 이룩하면 세상을 영원히 평안케 할 높은 뜻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뛰어들어 고찰하고 그것을 해결해 보고자 하는 치열한 의지 자체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럴 필요가 있다면, 나는 저 별들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신들의 얼굴에 내던지겠소. 만약 그럴 필요가 있다면, 나는 세계의 모든 신전을 파괴하겠소. 만약 그럴 필요가 있다면, 나는 마치 어부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처럼 수많은 목숨을 앗아 보이겠소. 설령 그곳으로 오르는 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이라도, 칼날이라도, 또는 맹호가 앞을 가로막더라도, 나는 다시 한번 〈천상 도시〉를 공략해 보이겠소. 어느날 신들은 〈하늘〉에서 그곳을 내려다보고, 그 계단을 오르는 나를,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선물을 지니고 오는 나를 발견할 것이오. 그리고 그날이야말로 새로운 유가(Yuga; 時代)가 시작되는 날이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나는 잠시 명상하지 않으면 안 되오." 이렇게 말한 후 그는 등을 돌렸고, 다시 수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성(流星) 하나가 불타오르며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배는 계속 전진했다. 곁에서 밤이 탄식했다. 샘은 앞을 바라보며,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런 맥락에서, [신들의 사회]의 전체 구조나 주인공 샘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봄직 합니다. 우선, 결-승-전-결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진행 구조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총 일곱 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 작품을 연대순으로 재배치하면 2→3→4→5→6→1→7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결말에 해당하는 1장과 7장을 앞뒤에 마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처럼 붙여놓고,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과거 회상에 해당하는 2장에서 6장까지의 내용을 전체 작품의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런 구조를 택하는 것은 꽤 위험한 일입니다. 1장에서 샘과 그 동료들은 과거의 투쟁에 실패하여 쇠락한 모습으로 다시 재기를 꿈꿉니다. 이런 도입부를 통해서 흔히 기대하게 되는 전개란 주동 인물들이 재기 과정에서 온갖 갈등을 겪으면서 점점 더 강해지고 세를 불려 최후의 결전에 임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신들의 사회]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재기의 의지를 다지게 해놓고는 갑자기 옛적 실패로 끝난 이야기를 한껏 풀어놓은 뒤에 마지막 장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오더니 곧장 최후의 결전을 진행시킵니다. 잘 나가다 막판에 조루라고 욕먹기 딱 좋은 구조입니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신들의 사회]가 조루는커녕 안정적으로 결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의 구조가 지향하는 바와 등장인물들의 세계관(혹은 작가의 세계관)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2~6장은 단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1장과 7장 사이의 '현재'에 있어야 할 것으로 기대함직한 기나긴 투쟁의 기록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즉, 샘의 일행들이 '현재'에 다시 재기하여 싸우는 내용을 길게 늘어놓는다면 그 기본 골격이나 정신은 2~6장의 반복이리라고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좀 더 부연하자면, 암살자의 습격을 받는다든지 악마와 동맹을 맺는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고스란히 반복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투쟁에 임하는 인물들이 지향하는 바와 정서가 동일하리라 믿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2~6장이 개별적인 사건들의 흥미진진함만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대신 그 과정을 통해 인물들의 정서/세계관을 드러내는 데에도 주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그들의 '과거'를 들여다봄으로써 그들이 어떤 태도로 삶에 임하고 싸움을 결심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몇 차례의 좌절이 그 정신을 끊지 못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할지,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중간에 삽입된 '과거'를 마치 '현재'처럼 취급하며 곧바로 결말을 향해 나아갑니다. '현재' 사이에 '과거'를 넣고 둘을 연결하는 데에는 1, 7장에서 나타나는 2~6장과의 연결고리들도 중요합니다. 1장에서 환생한 〈정각자〉 샘이 다시 한 번 수도승들을 일깨우기 위해 펴는 설법은 과거 그가 힌두 신화의 체계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를 끌어들였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7장에서는 (1장에서 보여준 '현재'의 설법이 아니라) '과거'에 샘이 패배하기까지 행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변화시켜가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가 발흥하도록 했던 불교문화가 여전히 힌두교 문화에 편입되지 않고 남아 지속적으로 신들의 지배 체계를 약화시켜왔다는 것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단지 '과거'와 '현재' 사이에 벌어진 상황 설명으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분위기와 전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맥으로서 제시됩니다. 이처럼 '과거'는 회상이라는 틀을 통해서 '현재'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현재'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뒤섞어 그것을 통째로 하나의 시간으로 바라보는 이런 방식은 젤라즈니의 초인들에게 곧잘 부여되곤 하는 중요한 한 가지 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바로 그들이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신들의 사회]의 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았고, 그 속에서 수많은 서로 다른 아이덴티티를 거쳐 왔고, 세상의 일이 한 차례의 거대한 승리, 판 엎음을 통해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전도서의 한 구절,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는 시간과 세계의 변화에 대한 젤라즈니식 초인들의 인식과 일치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진정 초인답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그런 깨달음 안에 살면서도 허무주의나 해탈의 영역에 이르는 대신 기꺼이 과거에 둘렀던 아이덴티티를 다시 불러내 두르고 과거에 했음직한 투쟁을 지금 이 순간 다시 행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변화를 유발하는 것이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긴 하지만 마지못해서,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다른 누군가가 해달라고 간청하니까 산중에서 유유자적하던 고수가 제자의 간청 탓에 강호 출두하는 듯한 태도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 하에, 자신의 행위가 의미 있다는 믿음 하에 다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싸움에 뛰어듭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의 대립에서 무엇이 더 옳고 그르냐 하는 문제이기 전에 정체된 채 부패해가는 세상을 다시 굴리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이쯤에서 [내 이름은 콘래드(This Immortal)]에서도 이미 잘 드러나고 있는 사실─ 젤라즈니의 초인들이 그 무용(武勇)과 모략으로 이름을 떨치는 인물들이긴 하지만 실제로 사건을 매듭짓는 과정에서 이들의 '물리적' 역할이 축소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는 검의 대가이자 전략가이고 스스로 나서서 수많은 액션을 벌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는 마무리하는 자가 아니라 들쑤시는 자입니다. 언제나 중심에 서 있는데도,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시선은 그의 주변으로 분산됩니다. 그는 정체를 멈추고 세상을 뒤흔들어 다른 사람들의 행동까지 끌어내는 구심점이지, 직접적인 승리를 누리는 자는 아닌 것입니다. (최후의 전투를 특히 주목하시라) 샘이 불타로서 설법할 때 아름다움(美)의 추구 자체에 대해 이야기할 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수행자 각자에게 맡기는 것처럼, [신들의 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대립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지지이전에 모두가 그것을 평가하고 지지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는 터를 마련하고자 하는 힘입니다. 물론 [신들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부패한 지배 구조를 개혁하고자 하는 혁명적 투쟁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만, 거기에 젤라즈니식 초인이 가진 시간과 세계의 변화에 대한 관념, 그리고 그 관념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의 전개 구조가 어우러지면서 세상의 흐름을 일으키고 뛰어드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담론으로 승화 내지는 확대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 힘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 그걸 느낄 수 있으니까. 기타 많은 것들이 돌아오고 있어. 우리가 라트리의 궁전에 체류했던 몇 주 동안 나는 내 전생에 관해 명상했네. 모든 것이 다 실패만은 아니었네, 죽음의 신이여. 오늘 그런 판단을 내렸어. 내가 저항을 했을 때마다 〈하늘〉은 나를 패배시켰지만, 승리할 때마다 그들은 높은 대가를 치러야 했던 거야." 덧 하나. 젤라즈니와 젤라즈니 (거의) 전담 역자 김상훈의 마초이즘(…)에 관한 이야기는 팬덤 사이에서 오랫동안 언급되어왔습니다. [신들의 사회]만 놓고 생각해 보자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변명할 수 없을 듯합니다. 여성 독자들이 기분 나빠할 만한 부분은 대게 캐릭터의 성격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옵니다만 이 작품 안에서는 그런 캐릭터들과 대비될만한─ 그 캐릭터들의 입장을 작가 자신의 입장과 분리시킬만한 다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젤라즈니가 여성에 대해 무심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 무심함이 오늘날에는 적극적(?) 마초와 구분하기 힘든 형태로 나타나는 듯합니다. 한편, 김상훈 역자의 역어 선택도 적어도 [신들의 사회]에서는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빠져나가기 힘들어 보입니다. 물론 작년에 소개된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매혹(Glamour)] 같은 작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런 문제에 무심한 태도를 취하는(or 독자들의 지적에 귀 닫고 사는) 역자는 아닙니다만 [신들의 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남성/여성의 어투는 문제시될 만합니다. 1993년 판의 번역을 2003년에 옮겨다 쓰면서 그런 부분도 손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여담이지만, 젤라즈니의 무심한 마초이즘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이 작가에게 여성 팬들이 많다는 사실이 의아해지기도 했습니다(그냥 있으면 끝까지 다 읽고 없으면 말고 하는 정도도 아니고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고 환호하는 여성 독자들이 곧잘 보이는 작가입니다. 이 척박한 국내 장르 마당에서조차!). 하지만 이내 여성 독자들이 그런 부분을 가려 읽지 못하고 책 전체를 외면할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더 마초적인 생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여성적 남성적 운운하며 독자를 성으로 구분하기도 어려운 것이, 요즘과 같은 시대에서 그런 무심한 마초이즘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여성 독자만이 아닙니다. 저 역시 [신들의 사회]를 읽을 때마다 항상 같은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로빈 우드의 지적처럼) 정치적 부적절함은 그것이 부적절함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악영향이 크게 줄어드는 법이고,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무심한 젤라즈니는 작품의 초점을 거기에 두지도 않습니다. (물론 디테일의 불편함 때문에 작품 전체를 버리는 경우는 무척 많이 접하게 되고, 이해도 됩니다만 제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을 가려내면서도 여전히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 있는 독자가 더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을 겁니다. 덧 둘. 로저 젤라즈니는 제가 마틴 스콜세지를 사랑하듯 사랑하게 된 첫 번째 작가입니다. (사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스콜세지가, 영화가 나중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젤라즈니가 부활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면 제 남은 수명의 반이라도 바치겠다는 말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좋은 작품과 좋은 번역자가 갈수록 늘어나서 이제 젤라즈니 한 사람에게 생명을 바치기는 그렇고, 생명 대 생명을 교환하는 대신 생명 대 출판사 자금줄을 교환한다거나 하는 쪽이 더 솔깃합니다─ 표지 홍보 문구 : "독자가 신장을 팔아 출판한 그 충격의 SF!" …우으윽) 저는 여전히 그의 장점을 좋아하고 단점 때문에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새로운 작품의 번역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덧 셋.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젤라즈니의 단편 [여기저기 드래곤들이 있음(Here There Be Dragons)]과 [스테인리스 스틸 흡혈귀(The Stainless Steel Leech)]가 올라와 있습니다. 전자는 유머러스한 팬터지 단편이고 후자는 특유의 낭만성 가득한 팬터지 or SF 단편입니다. 단편을 소개하노라니 행복한책읽기에서 [로저 젤라즈니 걸작선] 출간 기획을 갖고 있고 원래 2006년에 출간하려 했으나 올해로 밀렸다는 정보가 떠오릅니다만,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을 준비 중인 다른 서적들에 비해서 계획이 좀 더 느슨하게 잡혀있는 분위기인지라 마음을 느긋하게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좀 더 옛날에는 모 역자 분께서 개인 블로그에 [그림자의 잭(Jack of Shadows)], [루모코 이브(The Eve of RUMOKO)], [유니콘 변주곡(Unicorn Variations)]을 번역해서 올리셨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아껴두기만 하다가 그 분 블로그 리뉴얼 하면서 사라져서 좌절했습니다. 슬픈 옛날 이야기입니다. 덧 넷. 어슐러 K. 르 귄의 [로캐넌의 세계]와 그렉 이건의 [쿼런틴] 이야기를 했는데, 젤라즈니 작품 중에서는 [12월의 열쇠(The Keys to December)]와 [프로스트와 베타(For a Breath I Tarry)]가 비슷한 경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SF를 좋아하는 제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저처럼 폭력적(…)이지 않은 친구들은 그 두 작품을 젤라즈니의 가장 좋은 작품으로 꼽곤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친구들뿐인 것 같아서 좀 외롭기도 했습니다. 물론 [12월의 열쇠]와 [프로스트와 베타]도 좋아합니다만 저는 별 수 없이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The Doors of His Face, the Lamps of His Mouth)]이나 [폭풍의 이 순간(This Moment of the Storm)]에 더 환호하고야마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로캐넌의 세계]에 대해 첨언하자면, 저는 정확히는 그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단편 [목걸이]─르 귄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The Wind's Twelve Quarters)]에는 [샘레이의 목걸이(Semley's Necklace)]라는 제목으로 소개된─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거지만 [로캐넌의 세계] 전체를 두고 말해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덧 다섯. 1993년에 정신세계사에서 출판되었고 이후 수년 동안 절판되어 저 같은 늦은 입문자들의 발을 동동 구르게 하다가 2003년 행복한책읽기 SF 총서가 나오면서 재간되었습니다. 재간본은 초판 3쇄까지 소화한 뒤 현재는 개정판 1쇄까지 나왔는데 표지 디자인, 바코드 넘버, 가격, 판권 외에는 초판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괜히 가끔 사고 싶어집니다) 2003년에 출간된 SF 소설이 3쇄를 소화하고 4년째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원활하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감동적입니다. [쿼런틴] 같은 국내 초역 걸작들도 2쇄를 간신히 넘긴 뒤 3쇄를 찍지 못하고 품절 상태에 이른 상황인데, 이미 한 차례 소개되어 그래도 읽을 사람들은 다 읽어봤을 책이 복간 후에 이렇게 질기게 살아남다니, 국내 SF 시장에서도 스테디셀러라는 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희망찬 의문마저 듭니다. 고루고루들 이렇게 사랑받으면 좋을 텐데. 그나저나 확실히 판매복은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노라니 최근 전해들은 일화가 떠오릅니다. 덧 여섯.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박력 넘치는 문체와 액션에 특히 흥분했습니다만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다시 읽으니 이제는 유머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역자 해설에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힌두이즘이라는 소재와 〈과학〉 논리 사이의 상호작용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중층적 구조를 더욱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SF에 내포된 전복적(顚覆的) 글쓰기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후자가 젤라즈니 개인의 지성과 유머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겠지만)"이라는 말이 있는데, 예전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지만 점점 더 그 의미에 가까워지는 기분도 듭니다. 덧 일곱. 원서로는 여러 종류의 표지가 있습니다만 역시 가장 압권은 아래의 표지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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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한 글 잘 읽었습니다..
by kinoeyes at 08/19 말씀하신대로 류승완 감.. by sabbath at 08/17 참 말할 거리가 많은 영.. by 파인로 at 08/17 그쵸. 사실상 모든 프랑.. by sabbath at 08/16 아, 그것은… 저도 무.. by sabbath at 08/16 저도 그 글을 읽어보았.. by sabbath at 08/16 제작사 외유내강 측의 .. by sabbath at 08/16 소식 고맙습니다! 포스터.. by sabbath at 08/16 가끔은 너무 만든 사람에.. by sabbath at 08/16 먼저 안 보신 분들께는 .. by sabbath at 08/16 저도 만주 벌판 액션이 참.. by sabbath at 08/16 [다찌마와 리] 속편 또.. by sabbath at 08/16 오오, 드디어 올리셨군.. by Sion at 08/16 드팔마를 떠올리는 장면.. by 다찌대박 at 08/16 저는 그놈의 잘생겼다!가.. by 은혈의륜 at 08/16 최근 등록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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