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학(2007)]
 여하튼(사실 '여하튼'으로 빠져나올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두고두고 집착해야 할 것이지만 이건 독백이 아니라 편지니까요) 그 우울증을 떨치게 하는데 도움을 준 영화가(또 다시 영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몇 편 있는데, 그 중 현재 제 제1의 화두는 임권택입니다. 최근에 [태백산맥(1994)]과 [천년학]을 연달아 보고 (아, [서편제(1993)]도 봤네요. 전 그 영화는 깊이 와닿지 않았습니다만) 감읍하면서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해야겠다는 힘이 생긴 덕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태백산맥]은 보자마자 힘을 얻어 급히 휘갈겨 쓴 글이 있으니 그것으로 대신 하기로 하고, [천년학]은, 어젯밤에 본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 형에게 가장 먼저 들려드립니다.

 예전에 [취화선(2001)] 함께 보았을 적에 형이 토토에다가 그 사정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쓰셨지요. 저도 [태백산맥], [취화선], [천년학]에서 가장 좋았던 게 그 부분이었습니다. [천년학]은, 두 시간도 안 되는 굉장히 짧은 영화인데도 보고 나면 수십 년을 산 기분이 느껴지는─ 아니, 보고 나서가 아니라 보는 도중에도 그렇게 한없이 굽이쳐나가는 영화였습니다. 보통 이런 말은 영화가 지루하다는 얘기를 할 때 쓰는 것이지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 오히려 자꾸만 더 길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흐름을 즐겼어요. 정확히는 어떤 기분이었냐면 관객으로서 '아, 지금 이 느낌 정말 좋은데요. 조금만 더 이 순간을 즐기게 해주세요'하고 있으면 감독님께서 '안 돼' 하시며 칼로 시간을 확 내리치고 속절없이 다음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각각의 장면을 가슴에 담게 하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글쎄, 보통은 좋은 장면이 있으면 거기서 감정의 '뽕을 뽑고' 가는 것이 영화의 힘을 돋우는 데 좋다고 생각할 터인데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하나의 화려한 순간에 방점을 찍는 대신 세월 전체를 담으려 하고 있었어요. 심지어 결말조차도 단호하게! 그럼으로써 정말 울음이 쏟아지는 것은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그 길 위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천년학]이 그 전의 영화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면 그 시간을 치는 과정을 힘겹게, 필사적으로 좇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태백산맥]과 [취화선]은 굉장히 애를 써야 했는데(물론 그 영화들을 재미없게 보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보는 것이 힘겨운, 좋은 영화들이 있잖아요?) [천년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부분을 편안하게 따라갔어요(예, 가끔은 힘겨운 곳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장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이에게─죄송─할 얘긴 아닌 것 같습니다). ① 제가 임권택 감독의 화술에 더 익숙해졌거나, ②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거나 ③ 임권택 감독이 더 능수능란해졌거나, 뭐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은데 아마 ②와 ③의 혼합일 거예요(겸손이 아니라… [태백산맥] 본 다음날 [천년학]을 보았으니 대체 제가 익숙해지고 말고를 논할 겨를이 있었겠어요?). 소리꾼 남매의 삶은 물론 여러모로 한스러운 것이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은 한을 위해서, 고통을 위해서, 득음의 경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의 그리움을 위해서 나아가고 있었고, 그 그리움 또한 '못 만나 미치겠다'가 아닌(실제도 둘은 수차례 만났다 헤어져요. 한없는 슬픔을 안고 살다 마지막에야 만나는 게 아니라) 더 내밀한 것─아마도 서로가 하께 있어도 될 때는 기다리는 듯한 그리움이었기에 받아들이기 편안했던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순리를 따라간 사람들에 대한 영화였나 봐요.

 그렇기에 두고두고 아끼고 싶은 그런 영화였습니다. [서편제]처럼 일 년 정도 걸려있으면 사시사철 생각날 때마다 볼 터인데… 아무튼 멀티플렉스의 논리가 자비를 베푸는 그 날까지는 몇 번이고 보고 싶습니다. (DVD가 나오긴 하겠지만 그 스크린의 감흥이란… 이 영화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본 [짝코(1980)]를 제외하면 제가 처음으로 극장에서 필름으로 본 임권택 영화입니다)

 흠, 다시 보면 더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처음 본 자의 감상으로는 딱 적당하네요. 위의 몇 문단을 그대로 감상문으로 활용할까봐요.



by sabbath | 2007/04/18 11:42 | 영화 감상문 | 트랙백(1) | 덧글(6)
트랙백 주소 : http://sabbath.egloos.com/tb/155038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SabBatH at 2007/04/22 10:45

제목 : [천년학(2007)] 두 번째
 [천년학]은 따라가기 그리 어렵지 않은 영화다. 임권택 감독이 최근작들에서 곧잘 선보인 칼로 내려치는 듯한 편집은 여전하지만, 그리고 그 편집을 낯설게 여기는 관객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편집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개개의 장면에서 여운을 흘려보내지 않고 끊어내는 단호함에 찬반의 표를 던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 영화가 삶을 담아내는 태도에 대해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면들이 서로서로 앞서거니 뒤......more

Commented by N. at 2007/04/18 18:32
주말간 서울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이 17,000명 선이라고 하더군요...
임권택 감독이나 감독의 영화는 원래 별로 좋아하질 않았습니다만, 취재차(!) 가서 본 <천년학>은 정말... 좋았습니다. 임감독이 다시 보였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 영화가 좋아질 것같진 않네요. ;;;
Commented by sabbath at 2007/04/18 22:08
N. / 그러게요. 덧글 달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해야^^; 메가박스 광주에서는 지난 목요일에 개봉한 이 영화가 지난 일요일에는 다른 두 편의 영화와 한 관을 나눠서 쓰고 있더군요. 다행히 일요일에만 그런 거였는데 이번 주말은 장담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볼 기회가 있으면 다행일까요.

저는 작년에 [짝코]를 시작으로 해서 [춘향뎐], [취화선], [서편제], [태백산맥]을 거쳐 [천년학]에 이르렀는데 처음에는 독특한 영화를 만드는구나 정도였던 것이 이제는 무작정 껴안고 싶을 정도로 좋네요([서편제]는 좀 감흥이 떨어졌지만). 어제 [천년학]을 보고 나서는 거장들의 고유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임권택 감독 이후에 다시 임권택 감독처럼 영화를 찍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백 번째에서야 시작한 관객으로서는 참 슬퍼지는 일입니다.
Commented by N. at 2007/04/19 01:37
저는 농담삼아서 '아니 임권택은 원래 당대 최고 흥행감독이었어!' 뭐 이렇게 말하곤 하는데, 사실 별로 본 게 없습니다. 어쩌다 본 몇 편의 영화들은 이제껏 <천년학> 빼곤 그닥 좋지가 않았어요. 정성일 선생과 임권택 감독을 무척 좋아하는 친구는 저더러 '왜 하필 범작들만 골라보고 그렇게 싫어하는 거냐!'고 구박하긴 합니다만, 임감독의 최고작 중 하나로 반드시 언급되는 <만다라>도 저는 별로였던지라... 그래서 <천년학>이 좀더 특별하게 느껴졌답니다. 아주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게는, 아니 이 양반이 <천년학>부터야 좀 철이 드는구만! 이라고 아주 건방진 생각이 들었는데, 이건 사실 아주 건방질 뿐아니라 부당하기도 합니다. 실토하자면, 제가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태백산맥> 이후 <천년학>이 처음이거든요. (저도 저의 근거없는 이 적대감의 연원이 도대체 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그나저나 <천년학>을 봐서이기도 하지만 sabbath님의 글을 보고나니 아무래도 <춘향뎐>과 <취화선>, <하류인생>을 찬찬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Commented by sabbath at 2007/04/19 08:03
N. / 지난 주에 [씨네21]에 실렸던 [천년학] 특집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정성일 평론가도 [만다라]를 보고 "그렇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뭐… 이제 막 시작했으니…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춘향뎐] 만큼은 지극정성으로 추천하고 싶어요. '요즘 시대에 춘향전으로 뭘 어쩌겠다는 것이여'하면서 시큰둥하게 보기 시작했고(그럴 거면서 왜 봤냐 물으신다면… 일단 [축제]를 극장에서 본 애인이 임권택 감독 팬이 되고 있었고, 저도 [짝코]가 좋았으며, 정성일 평론가가 하도 야단이기에; 역시 평론의 대가는 낚시의 대가) 도입부에 마치 제 모습을 본딴 것 같은 대학생들이 리포트를 쓰기 위해 판소리 춘향가 완창 공연장에 들어서면서 나누는 대사를 듣고 낯간지러워 못 견디겠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방자가 몽룡이 명 따라 춘향 부르러 가는 대목에서 쾅! 하고 얻어맞고는 그때부터 정신없이 보았습니다. 지금은 정말 좋아하는 영화가 됐지요. 다만 부작용이라면 [춘향뎐]에 사용된 조상현 선생의 판소리가 워낙 깊이 남아서 [서편제]나 [천년학] 보면서도 [춘향뎐]에 사용되었던 대목이 나오면 무조건 감동해버리는 데다가 심지어 '송화 이 년아! 거기는 그렇게 부르는 거이 아니여!'하고 생각해 버리게 된다는 거;;
Commented at 2007/04/20 22: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7/04/20 23:09
비공개 / 이그! 어쩐지. 지난 한 주 내내 내 몸이 시원찮고 입술이 갈라져 피가 흐르더니만. 나는 환절기라고 방심하지 않고 옷도 잘 챙겨입고 식사도 잘 하고 퇴근 후에 나름대로 간략하게나마 운동도 하는데 왜 이렇게 골골하면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감기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걸까 했더니 이유는 따로 있었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난 나흘 간 밤마다 애달퍼 했어요. 오늘밤도 그럴 뻔했네.

푹 쉬어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