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출시될 크라이테리언 DVD들
 아주 가끔씩 찾아가는 크라이테리언 포럼에서 앞으로 출시될 타이틀 목록을 보고 환희작약 했다(정말 가끔 가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 글은 왜 이번에 처음 봤는지 모르겠다). 완전히 공식화되어 크라이테리언 사이트에 "앞으로 나올 타이틀"이라고 발표된 정보는 아니지만 그냥 추측도 아니다(이 포럼에서는 그냥 추측을 해보는 글은 따로 마련해 두고 있다). 이 정보는 게시판에 공지사항처럼 올라온 글로, 크라이테리언 측의 뉴스레터, 블로그, 웹사이트, 이메일 등을 종합하여 나온 목록이라 믿을 만하기에 마음껏 기뻐할 수 있다.

 워낙 많은 영화들이 언급되고 있어서 일일이 다 한국어로 옮기기는 힘들지만 관심 가는 것만 해도 ─

 일단도 크라이테리언 이클립스 시리즈 예정작 중 에른스트 루비치 뮤지컬들! 이클립스 시리즈는 작년부터 크라이테리언에서 따로 로고를 만들어서 출시하고 있는 박스세트 시리즈로, 특정 감독이나 주제를 중심으로 3~5 편의 영화를 묶어 출시하되 일반 크라이테리언 타이틀을 만들 때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복원과 어디서 다 끌어왔는지 모를 부가영상들을 덧붙여서 공을 들이는 게 아니라 당장 판권이 있는 작품들을 빨리/저렴하게 소개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다. 잉마르 베리만의 초기작 다섯 편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 세트씩 나오고 있는데 초반에는 '저건 뭐 하는 영화일까나' 싶은 작품들이 나와서 멀찍이 바라보고만 있다가 9월에 새뮤얼 풀러 초기작 세 편 세트를 보고 감동한 뒤 들떴다.

 이번 11월에는 쿠로사와 아키라의 전후(戰後) 영화 다섯 편 세트가 나오는데, 사실 이번 달에도 쿠로사와 아키라가 아니라 에른스트 루비치의 뮤지컬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터라 언제고 나오긴 나오겠구나 싶었지만 또 이렇게 "출시 확실" 목록으로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루비치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는 주로 [낙원의 소동(Trouble in Paradise, 1932)], [니노치카(Ninotchka, 1939)],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 1942)] 등의 코미디가 언급되지만(그리고 물론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그가 30년대 초반에 만든 뮤지컬 코미디들도 정말 즐거운 걸작들이다. 주로 모리스 슈발리에가 주연을 맡았는데, 그 사람의 능글맞은 연기가 황당할 정도로 낙천적인 부부 및 연인 관계에 대한 태도와 맞물리면서 엄청난 행복을 선사했다. 특히 나는 [미소짓는 중위(The Smiling Lieutenant, 1931)]를 정말 좋아해서, 아직도 루비치 영화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생각난다. 이 영화들은 그 때 회고전 후로 다시는 볼 길이 없어서 내 '환상의 영화' 목록에 들어갔는데, 드디어 DVD가 나온다니 감개무량하다. 현재 크라이테리언 포럼을 통해 알려진 출시 목록은 [사랑의 행진(The Love Parade, 1929)], [미소짓는 중위], [당신과 함께 한 한 시간(One Hour with You, 1932)]인데 부디 [몬테 카를로(Monte Carlo, 1930)]와 [명랑한 과부(The Merry Widow, 1934)]도 포함되어서 한방에 루비치 뮤지컬 세트를 완성해주면 좋겠다.

 (여담이지만 '환상의 영화'란 보기는 봤는데 다시 제대로 만날 길이 없어서 내 기억 속에만 아름답게 남아있는 작품들을 말한다. 물론 이런저런 특별전/회고전 덕분에 그 수가 늘기도 하고, DVD 출시 덕분에 줄기도 한다. 현재 명단에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 로버트 알드리치의 완전히 묻혀진 걸작 [황혼의 마지막 번뜩임(Twilight's Last Gleaming, 1977)]과 [캘리포니아 돌스(...All the Marbles, 1981)]. 쿠로사와 키요시의 하드보일드 영화 네 편 [복수: 운명의 방문자(復讐: 運命の訪問者, 1997)], [복수: 지워지지 않는 상흔(復讐: 消えない傷痕, 1997)], [뱀의 길(修羅の極道, 蛇の道, 1998)], [거미의 눈동자(修羅の狼, 蜘蛛の瞳, 1998)]. 최양일의 [10층의 모기(十階のモスキ-ト, 1983)]. 에드거 울머의 [우회(Detour, 1945)]. 조셉 맨키비츠의 [추적(Sleuth, 1972)]. 그리고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Heaven's Gate, 1980)] 감독판. 마지막 거 빼면 다 서울아트시네마 상영작이네. 만세삼창 한 번?)



괜히 올려보는 [천국의 문] 中 롤러스케이트 댄스 장면

 그 외 이클립스 시리즈로 내정되어 있다고 알려진 감독으로는 이마무라 쇼헤이,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일본 명감독들이 득세하는구나. 크라이테리언이 너무 쿠로사와 아키라만 좋아한다고 투덜거리는 이들도 있던데(사실 그렇기는 하다. 그렇지만… 좋잖아?), 슬슬 오명을 벗을 때도 되었지.

 그리고 크라이테리언 콜렉션 예정작은 정말 많은데, 목록 순서대로 살펴보면 코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3부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영화이기는 한데 일단 주연인 나카다이 테츠야 때문에 알게 된 뒤로 관심을 두고 있었던 작품. 나카다이 테츠야가 [인간의 조건] 이후 좀 다른 이미지의 배역을 해보자 해서 [요짐보(用心棒, 1961)]에서 악랄한 악당으로 등장했다는데 나는 이 사람이 멀쩡하고 선량한 역할을 한 걸 본 적이 없어서 [인간의 조건]의 이미지가 궁금하다.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인 주인공 카지가 2차 세계대전 하의 일본 사회에서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는데, 무엇보다도 코바야시 마사키 감독이 만들었던 [할복(切腹, 1962)]을 생각해 보면 결코 만만한 작품은 아닐 것이다.

 다음은 자크 타티 감독의 [축제날(Jour de Fête , 1949)]! [윌로 씨의 휴가(Les Vacances de Monsieur Hulot, 1953)] 이전에 만든 장편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다. 이건 나온다고 한지 꽤 된 것 같은데. 어쨌든 윌로 씨가 나오는 세 작품을 보고 나니 타티 감독의 영화라면 언제나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버전이 어떨지 궁금하다. 원래 톰슨 컬러로 촬영하려 했으나 아직 실험적인 기술이었던 탓에 카메라 두 대를 두어 흑백으로도 촬영을 했는데, 결국 톰슨 컬러 기술이 실현되지 못하면서(네거티브 필름까지는 만들었으나 거기서 컬러 프린트를 뽑아낼 수 없었다는 듯) 1949년에는 흑백으로 상영되었고, 1964년에 타티가 영화를 다시 편집하고 손으로 직접 필름에 색을 칠해서 재개봉을 했으며, 다시 1995년에 타티의 딸 타티셰프가 아버지의 뜻을 잇는다며 디지털 기술을 활용, 컬러 네거티브 필름에서 색을 뽑아내고 또 한 번 편집을 했는데, 그래서 결국 세 버전이 모두 모양새가 다르고 버전에 따라 없는 장면도 있다고 한다. 평소 크라이테리언 하던 짓을 생각해 보면 세 버전이 다 있을 것 같긴 한데, 정확한 건 나와봐야 알 일이지. 지금까지 유럽 이런저런 나라들에서 나온 DVD에는 64년 버전과 95년 버전만 실린 것 같다.



[축제날]. 95년 버전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1987)]는, 뭐 이 영화 즈음부터 시작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는 여러 번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내 친구와, 올해 [순응자(Il Conformista, 1970)]라는 굉장한 작품을 통해 만난 베르톨루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래도 초기작들이 더 궁금하긴 하다.

 [사랑의 여신들(The Love Goddesses, 1965)]. 이 목록에서 처음 보고 '이건 뭘까나'하고 IMDB에서 찾아보았는데,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인데, 고전기 할리우드에서 성(性), 특히 여자 배우들의 성에 대한 표현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라나. 주제도 흥미롭거니와 다큐멘터리에 수록된 자료 영상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배우들 명단이 화려해서 현혹당했다. 브리짓 바르도, 리처드 바틀메스, 잉그리드 버그먼, 루이스 브룩스, 모리스 슈발리에, 몽고메리 클리프트, 클로데트 콜버트, 개리 쿠퍼, 베티 데이비스, 마를레네 디트리히, 클라크 게이블, 그레타 가르보, 릴리언 기쉬, 캐리 그랜트, 진 할로, 리타 헤이워스, 오드리 헵번… 끝이 없다. 종종 이런 다큐멘터리는 주제나 만듦새와 상관없이 그냥 여러 가지 영화들의 장면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때가 있다.

 그리고 막스 오퓔스 박스세트! 와! 와! 이것도 '환상의 영화' 목록에 들어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메라 이동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당연히 마틴 스콜세지가 받들어 모시는 스승이다. 촬영감독 마이클 볼하우스가 막스 오퓔스의 조카로, 어린 시절 삼촌의 촬영 현장을 구경하고 다녔다니 할 말 다 했지) 일단 거론되고 있는 작품은 [윤무(La Ronde, 1950)], [쾌락(Le Plaisir, 1952)], [마담 드…(Madame de…, 1953)] 뿐이지만 설마 [모르는 여인이 보낸 편지(Letter from Unknown Woman, 1948)]가 빠지진 않으리라 굳게 믿어 본다. [포획(Caught, 1949)]과 [무모한 순간(The Reckless Moment, 1949)], [롤라 몽테스(Lola Montès, 1955)]까지 포함되면 박스세트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싸지겠지만 그래도 내주기만 하신다면 결연히 구입해 보겠습니다. 제발요.



[윤무]의 첫 장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카메라

 올해의 새뮤얼 풀러 만세 행렬에 동참하기 위해서인지 그의 대표작 [충격의 복도(Shock Corridor, 1963)]와 [벌거벗은 키스(The Naked Kiss, 1964)]도 재출시. 그리고 이미 들었던 사실이지만 말년의 작품 [마견(White Dog, 1982)]도 출시 예정. 새뮤얼 풀러 작품 출시에는 말이 필요 없다. 그런데 [파크 로(Park Row, 1952)]도 좀 출시해줬으면. 그 영화가 가장 보고 싶은데.

 또 내년에도 멜빌. 장 피에르 멜빌의 [밀고자(Le Doulos, 1962)]와 [레옹 모랭 신부(Léon Morin, prêtre, 1961)]가 있다. 언제 나올지는 몰라도 출시 가능성은 분명히 있는 작품 목록 중 [두 번째 숨결(Le Deuxième souffle, 1966)]도 있으니 여차하면 멜빌의 누아르 영화들을 모두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예상하지 못했기에 어안이 벙벙한 것으로는 마틴 스콜세지 단편 모음. [거친 면도(The Big Shave, 1967)]와 [이탈리아계미국인(Italianamerican, 1974)]이 중심이 될 것이고 그 외 학생 시절에 만든 다른 작품도 포함될 수 있다고 한다. [베수비우스 VI(Vesuvius VI, 1959)], [너처럼 좋은 여자가 이런 데서 뭐하고 있는 거야?(What's a Nice Girl Like You Doing in a Place Like This?, 1963)], [너뿐만이 아냐, 머레이!(It's Not Just You, Murray!, 1964)] 같은. [거친 면도]는 당장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영화들은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특히 스콜세지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이탈리아계미국인]은 꼭 보고 싶었기에 무척 반갑다.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비열한 거리(Mean Streets, 1973)] 전에 만든 다큐멘터리 [거리 풍경(Street Scenes, 1970)]과 조르지오 아르마니 다큐멘터리인 [산지: 밀라노(Made in Milan, 1990)]도 들어가면 좋겠다. 마틴 스콜세지 정도로 유명해지면 말년에는 이렇게 온갖 순간들이 다 까발려지는구나 싶다. 이 타이틀 출시되면 구하지 못할 스콜세지 영화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해질 터.



마틴 스콜세지의 단편 [거친 면도]

 그 외 이렇게 크라이테리언 측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정된 작품들말고 언급은 됐는데 확정은 안 된 것, 영화제 등의 행사나 타 매체의 기사를 통해서 알려진 작품들까지 포함하면 엄청나다. 이런 식으로 악착 같이 남의 통장을 갈취하려고 애를 쓰니까 주머니를 털어 줄 수밖에 없는 거다. 내년에도 고난은 계속되겠지. (실은 올해도 안 끝났다. 어쩌면 루비치가 12월에 나올지도?)



 덧. 왜 크라이테리언 포럼에서 이런 글을 처음 보았는지 알겠다. 크라이테리언 포럼 사이트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구나. .com과 .org. 내가 전에 들락거리던 곳은 .com이었고 .org는 이번에 처음 봤다. 생긴 게 비슷해서 둘 다 똑같은 사이트라고 생각했던 거다.
by sabbath | 2007/11/05 10:48 | 영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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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oIHLo at 2007/11/05 12:21
윤무의 첫 장면은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참, 얼마 전에 포인트 블랭크 드디어 봤습니다. 캘리포니아 느와르라 좋더군요 ㅎㅎ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05 13:31
oIHLo / 무시무시하다시니, 누가 보면 공포영화인 줄 알겠습니다^^;

예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볼 때는 막스 오퓔스의 카메라 이동이 아름답다고 감탄만 한 정도였는데, 이렇게 몇 년 지나고 나니 유튜브 같은 데서 드문드문 접하게 될 때마다 그 독특함이 더 눈에 들어와서 다시 영화 전편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이를테면 위의 [윤무] 영상에서 안톤 월브룩이 대사를 읊으며 무대를 좌우로 오갈 때, 그것을 카메라를 좀 더 멀리 두고 정지 상태로 잡거나 몇 개의 쇼트로 나누는 대신에 카메라를 인물에게 밀착하게 하여 함께 좌우로 따라다니는 식으로 연출한 것은 당시에 보았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굉장히 독특한 방식의 연출이네요. 그런 이동의 느낌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요.
Commented by .. at 2007/11/05 21:06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3부작이!!! 크라이테리언 제목보고 우연히 들어왔는데 대박소식 하나 건지고 가네요.
혹시나 내 주지 않을까 기대는 했는데 이렇게 빨리 나올줄이야..
나카다이 다쓰야의 나름 선량하고 멀쩡한 역으로 1960년도 나루세 미키오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에서 맡았던 역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1964년 작 '괴담'에서도 나름 선량하고 착한 역을 연기한 것 같은데요^^

오퓔스도 정말 너무너무 반갑구요. 역시 크라이테리언은 대단합니다.
이제 커버 디자인을 기대해야겠네요.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드려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05 23:39
.. /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와 [괴담] 모두 보고 싶은 영화들입니다만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본 나카다이 테츠야 출연작은 [요짐보], [츠바키 산주로], [대보살 고개], [할복] 뿐이에요. 그 중 [할복]이 가장 선량하다 하겠습니다만 이야기가 워낙에 세니… ^^;;
Commented by forveritas at 2007/11/06 05:27
아.. 참 영화를 좋아하게 되면서 '물질적으로'(신체 포함해서) 남루해지고 고루해지기 짝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마이클 볼하우스가 막스 오퓔스의 조카라는 사실이 참 재밌네요ㅋ. 그나저나, 영화 보면서 영어를 들여다 볼 줄이야.. 알다가도 모를 인생사네.허허허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06 13:27
forveritas / 그나마 영어 영화를 보기 위해 영어를 들여다 보는 건 괜찮은데, 프랑스어 영화나 독일어 영화, 일본어 영화와 광동어 영화를 위해 영어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참 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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