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 2005)]
 [폭력의 역사]를 보고 난 뒤 머릿속에 가장 깊이 남는 것은 플롯의 전개와는 별반 상관없어 보이는, 아마 흔한 '할리우드 스타일'로 접근했더라면 편집실에서 제일 먼저 잘려나갔음직한 디테일들이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부에서 아내 이디(마리아 벨로)의 차를 얻어 타고 시가지에 도착한 톰(비고 모텐슨)이 우체국을 들러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까지 걸어가는 장면. 이 장면은 단지 인물의 장소 이동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관습적인 장면이라고 넘길 수 없게끔 공들여 연출되었다. 특히 톰이 곧게 뻗은 길을 걸어가며 지나가는 행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당 앞에 도착하여 문간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은 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쇼트는 스테디캠으로 한 호흡에 찍었는데, 카메라는 멀찍이서 "톰이 식당에 간다"는 정보만을 전달하는 대신 톰의 뒤에서 함께 걸어가며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행인 데렉과 조셉의 얼굴을 바라보고, 문간에 놓인 쓰레기를 바라보며 얕은 한숨을 내뱉는 톰의 얼굴과 그가 캔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잡고 플라스틱 물병은 입구에 검지를 넣어 들어 올리는 과정을 몸을 굽혀가며 세밀하게 따라간 다음(이때 함께 보이는 청바지 허리춤에 달린 큼직한 휴대폰도 흥미로운 디테일이다. 청바지 자체도 톰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상을 구축하는 데에 훌륭히 한 몫 하고 있고) 다시 몸을 일으키며 톰이 쓰레기가 놓여 있던 곳을 발로 슥슥 문지르고 거리의 아침 풍경을 한 차례 둘러보는 모습까지를 담아낸다.

 "난 지금 대단한 걸 하고 있으니 여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줘!"라고 외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중에 골수팬들 덕에 발견되어 IMDB의 영화 뒷이야기(trivia) 코너에나 오르고 말 만큼 "보면 좋고 아님 말고" 식으로 슬쩍 넘어가지도 않은 채 어디까지나 간결하고 명확하게 핵심을 전달하는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아침 공기를 마시며 햇볕 따사로운 밀브룩의 한적한 시가지를 걸을 때의 상쾌함을, 길을 걷다 아는 사람과 마주쳐도 짐짓 깜짝 놀라는 대신 자연스럽게 이름 부르며 인사를 주고받고 지나칠 수 있는 소규모 공동체의 안온함을,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간혹 부주의해질 때 저지름 직한 사소하고 인간적인 흠들을, 그리고 그 모든 사소함에 주의를 기울이며 꼼꼼하게, 그러나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반응하는 톰의 품성을 단숨에 체감하게 된다. 그 중 어떤 요소도 이후 톰과 그 가족이 겪게 될 악몽의 전개에 직접 연관되지는 않지만, 이 장면이 전달하는 감정은 선명하게 와 닿으며 오래도록 남는다. 그리고 [폭력의 역사]에서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다.
 아니, 제목부터 흉흉한 영화, 그것도 인간 신체의 파괴와 재구성(쏘고, 찌르고, 녹이고, 뜯어내고, 찢어발기고…)의 달인인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맞나? 혹시 어젯밤 프랭크 카프라 영화 본 거 아냐? 싶은 표현이긴 하지만 이건 크로넨버그의 2005년 작 '액션 스릴러' [폭력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맞고, 이것이 크로넨버그로서 극히 예외적인 작업인 것도 아니다. 물론 크로넨버그는 보통 "그로테스크한", "징그러운", "역겨운" 등의 형용사가 수반되는 이미지로 명성을 얻었고, 그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그의 영화 세계 전체를 대표하게 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더 나아가 누군가 크로넨버그는 다리오 아르젠토처럼 독창적인 피칠갑 묘사의 달인이므로 그것만으로도 지금 같은 대접을 받기 족하다고 말한다면 그런 발언에도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다. 그러나 (아마 기괴한 이미지들을 신봉하는 공포영화 팬들이야말로 가장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뛰어난 영화가 될 수 없다. 감독으로서 크로넨버그가 지닌 진정 경외할 만한 자질은 그가 어떠한 허무맹랑한 이야기 앞에서도 그 이야기의 진실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 뱃가죽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에 비디오테이프를 집어넣어 '재생'시켜도, 신체 접촉을 통해 타인의 과거와 미래를 보게 돼도, 사람이 파리와 (문자 그대로) 한 몸이 돼도, 살아숨쉬는 초대형 바퀴벌레(?)의 주둥이(?)가 타자기로 변하고 항문(?)에서는 마약이 나와도, 살덩어리의 균열과 그것을 지탱하는 보철물 사이에 성기를 집어넣고 섹스를 벌여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런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질 수 있다고 믿으며, 대체 이 사건들을 체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를 전력을 다해 이해하고자 한다.
 [폭력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의 세세한 디테일에서 잠시 눈을 거두고 무감동한 표정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하다. 줄거리는 '소문 난 총잡이를 노리고 찾아 온 다른 총잡이들'과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새 삶을 찾아 살아가는 은퇴한 총잡이'라는 웨스턴-액션 장르의 두 가지 틀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단 한 순간도 플롯 상의 반전이나 예상외의 전개를 선보이는 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도식을 따라가고 있다. 자아성찰이 빠진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 1992)] 혹은 남성판 [롱 키스 굿나잇(The Long Kiss Goodnight, 1996)]쯤 될까. 실제로 존 와그너가 쓰고 빈스 로크가 그린 동명 원작 그래픽 노블은 아무리 너그럽게 보더라도 독창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구태의연한 액션 만화다(또는 여기에 이디를 연기한 마리아 벨로가 처음 각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뭐, 또 "남자 주인공의 아내" 역할이네'하고 시큰둥해 했다는 일화를 덧붙여 봐도 좋겠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이토록 진부한 이야기에 어떤 독창성을 불어넣기 위해 관습들을 의식적으로 뒤틀거나 뒤집거나 아예 장르 밖으로 나가버리는 대신, 이 이야기가 만드는 사람이나 감상하는 사람이나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지 대충 다 짐작하고 진행해 나가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내게 닥친 일이라고 여기며 접근해 나간다. 설렁설렁 넘어가더라도 웬만하면 '다 그런 거지 뭐'하며 무탈하게 넘어갈 장면에서도 이를 악물고 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이 지난 수십 년 간 살아온 방식을 생각해 볼 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를 집요하게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그 결과 장르적으로 볼 때 진부하다 여길만한 순간들이 여기서는 하나하나 가슴을 철렁케 하며 비수를 꽂고, 감정이 최고에 이르는 클라이맥스들은 예상과는 다른 순간에 펼쳐진다.
 [폭력의 역사]를 극장에서 본 한 친구는 상영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한국어판 포스터의 카피 ─ "숨기고 싶었던 그의 과거가 반복된다!"를 가리키며 "저거 스포일러 아냐? 난 이 영화 처음 봤을 때 톰이 조이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봤는데"라고 말했다. 그게 스포일러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 또한 이 영화를 볼 때면 언제나 톰이 조이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되어가는 과정 앞에서 숨을 죽이며 조마조마하게 다음 순간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사실 톰이 조이라는 걸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어느 날 포가티(에드 해리스)가 찾아와서 톰을 조이라고 부르는 순간 톰은 조이이거나 아닐 수밖에 없는데, 만약 아닌 쪽을 택한다면 이야기를 전개할 방법이 곤궁해진다. 히치콕식 '누명 쓴 사나이' 전개를 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도입부가 너무 묵직하고 장황하다. 또한 톰을 압박해오는 포가티의 태도는 오해나 거짓이 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에게 들은 게 아니라 내가 본 걸 말하는 거야"라는 이디의 말처럼, 톰은 말로 진실을 털어놓기 전에 이미 그가 얼마나 사람을 잘, 효율적으로, 전문적으로 죽이는지 네 구의 시체를 통해 보여주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더라도, 톰이 조이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것도 보여주었다. 자상한 아버지의 역할을 해내고 싶어 하지만 아들은 이미 독립된 개인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며 다소 멋쩍어 하고, 자신보다도 일찍 식당에 온 단골손님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아내와 사랑을 나누기 전 소년과도 같은 흥분으로 눈을 빛내고, 흉포해 보이는 사내들 앞에서 여자 종업원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애원하고 달래는 목소리로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며 애써 위협을 피하고 싶어 하는 모습들을 모두 보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의 모든 순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뒤 꼼꼼하게 되살려낸 듯한 이 영화의 디테일은 그저 등장인물들의 설정을 개념화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음, 이 남자는 베트남전 참전자고 사회 복귀 후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품고 있군." "아, 저 여자는 자상한 남편, 귀여운 아이들과 더불어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주부 생활 속에서 억압된 자신의 가능성을 안타까워하는 일면도 갖고 있군") 나 자신이 그 인물의 삶을 함께 살아봤던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따라서 톰이 포가티에게 "그 때 필라델피아에서 네 놈을 죽였어야 했는데."라고 내뱉는 순간은 단지 반전이 나오며 플롯이 전환점을 지나는 순간이 아니라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다. 그 이전에 제시된 어떤 생생한 폭력묘사도 이 충격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그리고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톰이 아들 잭(애쉬튼 홈스)을 향해 다가갈 때, 비고 모텐슨은 일생일대의 연기력을 발휘하여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표정과 작은 제스처만으로 조이를 통해 알고 있는 폭력의 상흔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리고 톰이 그 세계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으며 자신의 아들이 거기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 앞에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를 표현해냄으로써 충격에 쐐기를 박는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크로넨버그는 어떤 순간의 감정을 주도면밀하게 포착하여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고 해서 스스로 굉장한 걸 해냈다고 만족하고 물러서는 적당히 열성적인 감독들보다 훨씬 멀리 나간다. 그에게 믿음이 부서지는 순간의 충격이란 본론의 첫머리에 불과하다. 톰의 병실을 찾아온 이디는 이 주제를 더 확대한다.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슬퍼하는 아내 앞에서 남편이 울먹거리며 사과를 하다 보니 다시 서로의 사랑을 확인케 되고, 다시 이야기의 중심은 남자 주인공과 그가 벌이는 (속죄/과거 청산으로서의) 액션으로 돌아오는 식의 전개를 취하며 편히 갈 수는 없다(원작 그래픽 노블은 바로 이렇게 하고 있다). 이디의 입장에서, 이 사건은 타인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톰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인생을 꾸려온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조쉬 올슨이 쓰고 크로넨버그가 함께 다듬은 [폭력의 역사] 각본의 훌륭한 점은 아무리 강렬한 장면이더라도 길고 인상적인 연설이나 평소에 좀처럼 쓰지 않는 표현들로 점철된 '죽이는' 대사는 배제한 채 일상적인 대사만으로 장면의 정수를 포착한다는 것이다. 이런 각본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담고 있으면서도 말의 힘을 과신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연기자의 역량을 신뢰한다. 비고 모텐슨과 마리아 벨로는 신뢰에 부응한다. 톰의 부서진 육신 너머로 조이의 모습이 어른거릴 때 대체 어제까지 나와 몸을 섞고 내 아이들을 함께 품었던 저 자는 누구인가 하는 공포가 이디를 잠식하고, 그 물음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구토를 참을 수 없다. 마리아 벨로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떻게 당신이 날 속일 수 있어, 가 아니라 그렇다면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뒤섞여 만들어 온 나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이다. 그녀는 자신과 아이들의 성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는다. 톰은 대답한다. "그게… 쓸 수 있는 이름이었어. It was… available." 이디는 대꾸한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써먹기 좋은 사람이었겠지. Yeah. I guess I was available too." 나의 생이 내 존재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단지 생판 모르는 사람의 정체를 감춰주는 협잡으로 이용당하기 위해 꾸려져 왔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분노가 이디의 표정과 몸짓 안에 가득하다.
 비고 모텐슨의 가슴 아픈 모습은 이디의 감정을 받쳐주면서 갈등을 더 심화해 나간다. 상처 입고 침대에 누운 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가져다준 격통, 이제부터 자신이 이디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오는 아픔을 억누르며 간신히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여전히 조이인 만큼이나 톰임을 알게 된다. 혹은 톰임에도 불구하고 조이일 수밖에 없거나. 아마 이디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이 사실일 것이다. 복수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톰/조이는 하나의 정체성을 여러 개의 이름으로 포장하지도 않고, 스위치를 껐다 켜듯 두 정체성을 한 번에 하나씩 오가지도 않는다. 톰은 조이가 자신과 별개의 인물, 떼어내어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인 양 말하고 있으나 실상은 언제나 내 안에 잠복한 채 스며 나올 계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한 부분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이디도 알고 있다. 둘은 하나이며 처음부터 그랬다. 조이를 떼어낼 수는 없다. 조이 때문에 톰을 떼어낸다면 그녀의 생은 붕괴될 것이다.
 여기까지만도 강렬한 통찰이다. 이제 혼신의 힘을 다해 이들을 망가뜨려 그 고통을 뼈저리게 전달한다면 폭력이 어떻게 사람을 되돌아 올 수 없는 길로 밀어 넣는가, 폭력의 영향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간단히 말해 폭력은 왜 나쁜가, 에 대한 생생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고 덤으로 9/11과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사회가 피할 수 없게 된 울적한 상황에 대한 비탄 어린 성찰이라는 식의 평가도 얻어갈 만하다(실제로 [폭력의 역사]는 어느 정도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그러나 크로넨버그는 같은 지점을 더 파고든다. 이 시점에서 과거로부터 돌아온 폭력배들과의 알력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이들과의 갈등을 일단락 짓는 후반부 필라델피아 쪽의 이야기는 물론 깔끔하게 연출되었고, 재미있는 디테일들이 엿보이며, 액션에 대한 욕구도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고([폭력의 역사]의 폭력 장면이 아무리 충격적일지라도 그것을 어느 정도 갈구하게 되는 순간이 있으며, 그건 바로 관객의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는 순간임을 지적하는 허문영과 DJUNA의 지적은 정확하다. 물론 끔찍한 폭력을 표현하는 영화들에는 언제나 그런 딜레마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폭력의 역사]는 관객에게 내재된 공격성을 의식하고 끌어내고 있으며, 사실상 이는 영화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윌리엄 허트의 허세 가득한 연기를 즐길 수도 있지만 전체 영화의 맥락에서는 비교적 늘어지는 의무방어전에 가깝다. 적어도 거기서의 액션이 클라이맥스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후일담이라고 여기는 관객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중요한 건 톰에게 조이가 내재되어 있다는 깨달음 자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아버지를 어느 정도 거부하며 독립된 개인으로 자라나고 있으면서도 자신 안에 같은 것이 있음을 지나치게 빨리 깨달아버린 아들 잭과 '나쁜 놈들'의 뼈와 살을 부수고 찢어내는 순간 불가항력적인 쾌감을 느끼고 마는 우리 자신을 통해 인간성 자체에 대한 시선으로 확대된다. 크로넨버그에게 있어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 내 안에 너 있다.
 크로넨버그 영화 속의 '변신'은 언제나 내부로부터 찾아온다. 그는 변화가 나의 것, 내 본능 한편에서 갈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걸 부정하면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비디오드롬(Videodrome, 1983)]의 뇌종양이 그랬듯이, 머지않아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변화시킬지 모를 뿌리가 내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두렵지만 그걸 떼어낼 방법은 없다. 유일한 돌파구는 과정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눈을 돌리거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배척하지 않으며 다만 변화를 끌어안고 끝까지 가는 것뿐이다. [폭력의 역사]는 사태를 해결한 뒤 "당신과 나는 사는 세계가 달라"라며 머나먼 지평선을 향해 사라지게 하지도 않고, 갈등의 축이 되는 인물 중 누구 하나를 죽여서 아직 끝나지 않은 물음을 적당히 덮어버리는 허다한 액션 영웅 이야기들의 전례를 따르는 대신 톰/조이를 조용히 집으로 돌려보낸다. 집에는 이제 자신들의 삶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전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깨달아버린 가족들이 있다. "그래도 우린 서로를 사랑하니까"를 내세우기는 너무 늦었고,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견디는 중이다. 나의 삶 안에는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중이다.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이제 다시는 예전의 행복한 무지(無知)함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이기에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내 삶 속에 한데 섞인 이 사람들과 함께. 그들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본다. 살아가기에 사람인 존재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용기다.









 덧 하나. 그 동안 읽은 관련글 중 특별히 이 글을 쓰는 동안 여러 번 기억났던 글들을 나열한다. (게재 날짜 순)

 〈폭력의 역사〉, 인간다움의 정의 - [FILM 2.0] 김영진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제 1 부 리뷰: 스포일러 없는 편) - DJUNA의 영화낙서판 Q 님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제 2 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스포일러) - DJUNA의 영화낙서판 Q님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 * * 1/2 - DJUNA의 영화낙서판
 폭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질문하는 영화 〈폭력의 역사〉 - [씨네 21] 허문영

 그리고 평론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폭력의 역사]를 볼 때면 언제나 2005년 칸 영화제 이후 짐 호버먼이 쓴 칼럼의 일부가 떠오른다. "올해 칸에서는 고참들이 그 여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경쟁부문에서 가장 강렬했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익살스럽고 잔인한 메타 스릴러 〈폭력의 역사〉는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가 2002년 심사위원들에게 무시당했듯 빈손으로 남겨졌다. 도대체 얼마나 좋아야 상을 받을까?" 그러게.


 덧 둘. 크로넨버그 영화 DVD 몇 장 더 팔리는 거 보자고 쓰기 시작한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최근 우리나라에도 출시된 [폭력의 역사] DVD는 내용만 따지자면 작년에 출시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파리(The Fly, 1986)] DVD와 마찬가지로 "올해의 DVD"로 꼽힐만한 타이틀이다. 이 영화의 코드1 DVD(미국판)는 작년 여름 처음 만나 이틀에 걸쳐 내용물을 모두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소중히 아끼고 싶은 코드1 타이틀"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데, 그 수록물의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모양새도 놀랍거니와 모든 부가영상에 기본적으로 영어 자막을 지원해줬고, 영어 자막을 지원하지 않는 크로넨버그 감독의 음성해설은 발음이 워낙 분명하고 속도도 적당하여 자막 없이 알아들을 만했다. 그래서 내용물이 풍성하고 그 풍성함을 모조리 즐긴 최초의 코드1 타이틀이었다. 한국판 DVD의 내용물은 바로 이 코드1 타이틀을 (기본적으로는)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
미국판 DVD 메뉴

 몇몇 차이점들에 대해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내용물만 보자면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단독 본편 음성해설이 있다. 모쪼록 팬심에서 비롯된 발언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DVD 음성해설 중에서는 가장 포만감 느껴지는 음성해설이다. 이미 [파리]와 [스파이더(Spider, 2002)] DVD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소개가 되었지만 크로넨버그의 음성해설 스타일은 쓸데없는 잡담은 철저히 배제하고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각 장면의 연출 과정에서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 그 의도를 성취하기 위해 고민했던 요인들을 차분하게 짚는 것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데, 듣고 있노라면 이런 감독이라서 이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음성해설을 하고 있지만 딱히 지치는 기색도 없이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톤으로, 더듬거리거나 머뭇거리거나 하지도 않고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특히 이 영화에 대해 감상문을 쓸 사람들은 글쓰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이 음성해설을 듣지 않기를 권한다. 서너 문단에 걸쳐서 간신히 파헤치고 풀어놓은 이야기를 크로넨버그는 서너 문장으로 확실하게 짚어버린다. 듣고 있으면 대체 내가 이 영화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있기는 한가, 그냥 영화나 한 번 더 봐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Acts of Violence"라는 제목의 한 시간이 넘는 메이킹 필름. 총 여덟 개의 막(act)으로 이루어진 이 영상은 음성해설과 마찬가지로 늘어지는 일 없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소들을 다양한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서 들려준다. 메이킹 필름이라는 이름을 달고 기껏해야 서로 잘났다고 자화자찬이나 하는 타입과는 완전히 다르며, 본편 음성해설과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크로넨버그 감독이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루었던 문제들이 배우와 스탭들을 통해서는 또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Acts of Violence

 또 한 가지 힘을 주고 싶은 부가영상은 삭제 장면 영상과, 그 삭제된 장면의 메이킹 필름인 "The Unmaking of Scene 44". 삭제 장면은 단 하나, 씬 44로 명명되고 있는 장면뿐인데,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거장인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솜씨에 열광하는 팬들이라면 반드시 환호할만한 장면이다. "The Unmaking of Scene 44"는 바로 이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제작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장면은 크로넨버그의 음성해설을 곁들여 볼 수도 있는데, 그는 이 장면이 편집 과정에서 빠지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참고로 이 삭제 장면은 그냥 촬영했다가 나중에 안 써먹어서 남겨둔 것을 그냥 갖다 붙인 게 아니라 [파리] DVD에 수록되었던 삭제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오디오 믹싱까지 완벽하게 거쳐서 지금 당장 본편에 끼워 넣어도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The Unmaking of Scene 44

 그 외 "Too Commercial for Cannes"라는 2005년 칸 영화제에 참석한 크로넨버그 감독 일행의 모습을 담고 있는 8분여 가량의 영상이 있다. 칸에 대한 인상을 담은 일종의 간략한 기행기인데, 상당히 짜임새 있다. 칸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소회며 상영 전날 극장을 찾아 상영 환경을 점검하는 과정도 짧지만 흥미롭고, 기자들의 사진 촬영에 응하는 모습에 담긴 장난기는 유쾌하다. 인터뷰의 내용이 풍부하게 담기진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영화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접근을 명쾌하게 풀어내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으니 영화 내용을 정리하는 데도 적절한 도움을 주고 있고. 그리고 본 상영이 끝난 직후 크로넨버그 감독이 기나긴 기립 박수 속에서 배우들을 끌어 안고 행복해 하는 순간은 정말 감동적이다.
Too Commercial for Cannes

 아마 "Violence's History: United States Version vs. International Version"이라는 미국판과 국제판의 차이를 다룬 영상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텐데,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미국판은 국제판에 비해 잔혹한 장면의 강도가 약간 덜해졌다. 원래는 피가 확 튀어 나오는 장면인데 그냥 흐르는 정도로만 조정한 수준으로, 굉장히 짧은 두 개의 쇼트에 변화가 있었을 뿐 폭력 장면의 핵심 묘사가 달라진 건 아니라서 (총 맞고 날아가 버린 턱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든가 하는 건 없다는 얘기다) 크로넨버그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DVD에 굳이 두 버전을 따로 수록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참고로 DVD에 수록된 본편은 미국판이고, 우리나라 개봉 당시 상영되었던 필름도 미국판이었다. 정말 미세한 차이이므로 그 문제에 신경 곤두세우지 마시길.
Violence's History: United States Version vs. International Version

 여기에 예고편이 더해지는데, 이 모든 부가 영상들은 한국판 DVD에도 고스란히, 한국어 자막을 단 채로 수록되어 있다.

 다른 점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먼저 사소한 차이. 미국판은 메뉴 화면 뜨기 전에 [폭력의 역사]와는 상관없는, 뉴 라인 시네마에서 배급하는 다른 영화의 광고가 하나 나오고 뉴 라인 시네마 영화사 로고가 나오는데 한국판 DVD에서는 삭제되었다. 이거 가지고 불만 품을 사람은 없을 테고……. 메뉴 화면이 좀 다른데, 미국판은 DVD-ROM Online Features를 지원하지만 이것도 한국판 DVD에는 없다. 우리나라 타이틀에서는 좀 낯선 이 온라인 피처라는 것을 설명하자면, TV에 연결해서 쓰는 DVD 플레이어 말고 컴퓨터의 DVD-ROM에서만 활용이 가능한 자료를 담고 있는 건데, 좀 더 상호작용이 가능한 기능들, 혹은 DVD 영상을 통해 제공하기보다는 일반 문서 파일로 제공하는 편이 더 나은 자료 등을 제공한다. 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져서 그런지 이 온라인 피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타이틀은 딱히 본 적이 없다. 내게는 그저 실제 각본을 파일로 받아 읽어볼 수 있는 정도의 의미뿐으로, [폭력의 역사]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 타이틀은 화면 한쪽에 영상을 띄우고 반대편에는 각본을 띄워 각본과 영화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기능을 지원하고 있지만 컴퓨터 사양이 낮아서인지 원활하게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유용한지도 모르겠고. 각본을 읽어보고 싶다면 인쇄도 제공하니까 인쇄해서 읽고 말지. 하여간 이 기능을 한국판 DVD가 지원하지 않는다는 건 별로 아쉬워 할 일이 아니다.
한국판 DVD 메뉴

 중요한 차이는, 물론 자막이다. 한국어 자막의 번역에 관해서 말하자면, 일단 본편 자막은 극장 개봉 당시의 자막을 그대로 가져온 뒤 아주 사소한 몇 부분만 고쳤다. 그러니까 극장 상영 당시 "Unless it's out of the park."라는 대사를 "홈런 치면 힘없죠."라고 번역했는데, 이걸 다시 "홈런이면 속수무책이죠."라고 바꾼 수준(재밌는 이야기를 하자면, 음성해설을 들을 때도 간혹 크로넨버그 감독의 말이 끊길 때는 본편 대사의 자막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거기서는 이 대사의 자막이 다시 "홈런 치면 힘없죠."로 뜬다. 이 DVD의 자막을 극장 자막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었다는 증거라고나 할까). 일단 극장 자막의 번역이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기에 나름대로 잘 된 일이기는 하다. 점점 더 우리나라에서 외국 영화에 달아 놓는 한국어 자막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B0, 좀 관대하게 가자면 A-까지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름대로 사려 깊다면 깊고 게으르다면 게으르다고 할 수 있을 이 선택 때문에 더 나은 자막을 볼 기회를 놓친 것은 안타깝다. 극장 자막에 있었던 일부 오역은 DVD에도 여전히 존재하고(이에 관해서는 위에 링크한 Q 님의 첫 번째 글에서 덧글을 통해 짤막하게 이야기한 바 있다), 극장 자막이 놓치고 있었던 미묘한 뉘앙스(특히 지역 보안관 샘과의 관계를 통해 은근히 드러나는 이 마을의 안온한 소도시 분위기)도 여전히 놓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불살라먹고 주제를 갈아 마시는 막돼먹은 실수는 아니라는 점에 감사해야겠지만 [폭력의 역사]가 아주 사소한 뉘앙스들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 많은 영화임을 생각하면 아쉬워 할 일이기는 하다. 특히 DVD에 수록된 음성해설 및 부가영상들을 통해 이런 디테일에 대한 설명이 빠짐없이 나오니 더 그렇다. 그걸 참조해서 본편 자막을 다듬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음성해설 자막은 상상 이상으로 준수하다. 조사 부족으로 인한 미흡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음성해설 막 시작했을 때 뉴 라인 시네마 로고에 흐르는 음악을 작곡한 마이클 케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드라마 [사각 지대(The Dead Zone)]의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오역이다. 크로넨버그가 말하는 "The Dead Zone"은 2002년에 나온 TV 드라마가 아니라 자신이 1983년에 만든 크리스토퍼 워큰 주연의 동명 영화를 가리킨다. 또 음성해설 도중 크로넨버그는 자신은 언제나 유머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왔다면서 아마 [브루드(The Brood, 1979)] 정도만이 예외일 거라고 말하는데, 이걸 "브루"라고 표기하고 있다(이 표기가 반복해서 몇 번 나오기 때문에, 오타는 아니다). 실제 크로넨버그의 발음을 들어보면 끝의 d 발음은 거의 않고 있어서 이는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충분한 지식 없이 청해만으로 음성해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실수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말이지 부족한 부분이라고 해봐야 이런 정도고,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 크로넨버그가 들려주는 정보를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정도면 상당히 믿음직스럽다.

 반면 부가영상의 자막은 음성해설 자막에는 못 미친다.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면 비문은 아닌데 문장을 연결해 놓고 보면 단번에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다. 예를 들어서 "Acts of Violence"의 내용 중 편집자 론 샌더스가 세트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이런 자막이 나온다. "미술 감독이 만든 세트는 굉장히 훌륭했어요. 요술로 만든 세트 같았죠. 하지만 지쳐서 훌륭한 세트 같은 것은 잊어버리게 되죠." 어째 황당하다. 세트는 엄청 잘 만들었지만 스탭들이 일하느라 지친 나머지 세트의 훌륭함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는 건가? 그는 계속해서 세트가 워낙 훌륭해서 편집자인 자신은 실외 장면과 실내 장면이 연결 될 때 밀브룩에서 촬영한 로케이션 장면에서 세트 장면으로 바로 컷하기만 하면 됐다는 이야기를 한다. 원문을 보면 내용이 이해가 된다. "The set that Carol built, it was a beautiful job of art direction and construction and sort of movie magic. You get jaded, but you forget the magic of cinema that you can actually build something." 이 영화의 세트는 얼핏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 흥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저게 만들어진 세트라는 사실을, 그걸 가능하게 하는 영화의 마법을 잊고 있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이야기다. 아쉽지만 이런 식의 오역이 여기저기 있는 편이다. 오역이 아니더라도 정보 전달력은 음성해설 자막에 비하면 부족한 편이고.

 이런 결과는 의외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판 DVD는 음성해설에는 영어 자막을 지원하지 않지만 부가영상에는 영어 자막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청해에 의존해서 만들어야 하는 음성해설 자막보다는 독해를 할 수 있는 부가영상의 자막 만들기가 훨씬 수월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마 ① 화자가 크로넨버그 한 사람인 음성해설과 달리 여러 사람의 다양한 목소리가 뒤섞인 내용을 다루다 보니 집중력이 떨어졌거나, ② 영어 자막이 있으니까 번역이 쉬울 거라고 자만했거나, ③ 음성해설과 부가영상의 자막 번역을 맡은 사람이 동일인이 아니거나, 뭐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참고로 한국판 DVD는 미국판 DVD에 있던 부가영상 영어 자막은 지원하지 않는다.

 한국어 자막의 폰트는 썩 나쁘지 않지만 자막 위치는 좀 더 높았어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메이킹 필름 자막을 만들 때 화면에 등장한 인물이 누구인지 소개해주는 자막은 그들의 말을 번역한 자막과는 좀 떨어진 위치에 띄워서 보기 편하게 해주는 배려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DVD 재킷이야 미국판 DVD도 결코 좋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한국판 포스터를 그대로 가져와서 "숨기고 싶었던 그의 과거가 반복된다!"라는 카피까지 넣은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 아쉽다. 미국 극장 개봉 당시 사용되었던 포스터를 사용했더라면 아주 만족스러웠을 텐데. 그러나 투명 케이스를 쓰고 재킷 반대편에 영화 스틸컷을 넣어 케이스를 열면 보이도록 한 디자인은 미국판보다 낫다. 결론적으로 말해 내용물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박수갈채를 보낼 수 있는 뛰어난 타이틀이지만 한국어 자막은 그에 비하면 약간 부족한 면이 있는 편이다. [파리]처럼 고민 없이 "올해의 DVD"로 밀 정도는 아니고, 훌륭한 소스를 한국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꽤 노력한 타이틀, 정도.
by sabbath | 2007/11/23 10:34 | 영화 감상문 | 트랙백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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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파인로 at 2007/11/23 12:26
저에겐 일전에 비고 모텐슨의 연기력을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셨던 '톰에서 조이로 바뀌는 장면'이 유난히도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처음 극장에서 볼 땐 '우와! 조이의 등장인가!' 하면서 두근두근 지켜봤는데, 두세 번쯤 보다보니 바뀐다는 표현으로는 그 변화를 설명하기 부족하더라고요. 어찌 보면 마치 한숨 쉬듯 휴우, 이렇게 튀어나오는 것 같다가도, 톰의 내면으로부터 스멀스멀 나오는 것도 같고, 또 다르게 보면 변화라는 건 없이 그저 톰&조이였던 것도 같습니다. 그저그런 영화에서 그저그런 연기자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면 '뭐야, 이건. 좀 똑바로 연기하라고!'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란 말이죠(그런데 만약 톰이 조이로 바뀌었다면 그 지점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총을 버리는 그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총을 버리기 전 클로즈업 된 톰의 얼굴엔 공포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는데, 포가티가 다시 한 번 총을 버리라고 명령하고 난 후 미디엄 쇼트로 찍힌 조이의 얼굴엔 마치 "이따위 장난감 총(popgun)? 까짓거 버리라면 버리지 뭐." 라고 써있는 듯 합니다). 말씀하셨던 병원에서의 대화도 후덜덜이고요. 정말이지 극장에서 영화 보는 내내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에드 해리스의 연기력을 빛난다고 표현하면, 비고 모텐슨은 그냥 광원 그 자체입니다.

영화 자체에 대해 말해보면,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가 참 군더더기 없이 꽉 짜여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잭이 자신을 괴롭히던 놈을 두들겨 팬 후의 시퀀스를 보면, 톰이 잭을 혼내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손을 대고, 역시 감정이 격해진 잭이 뛰쳐나가고, 바로 그 직후(씬으로 보면 그렇죠) 외출 나갔던 이디와 사라가 돌아와 포가티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고, 그 말 끝나기 무섭게 포가티 일당이 나타나고, 슬슬 아들의 존재가 관객에게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무렵에 포가티 일당에게 잭이 납치되었다는 게 드러나죠(그 후 이디가 들고 나온 총이 영화에서 얼마나 알뜰살뜰하게 쓰이는지도 적고 싶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떠버리를 참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말씀 드리면 굉장히 부담스러워 하실 지도 모르지만 sabbath 님께서 이 영화의 감상문을 쓰시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DVD에 대한 감상까지 곁들인 것으로 말이죠 :-) 보게 되어서 기쁘네요. 이런 감상문 덕분에 sabbath 님이 오래 쉬셔도 '뭐하시는 걸까.' 라는 생각보단 '이번엔 또 어떤 글을 쓰시려나.'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Commented by 파인로 at 2007/11/23 12:34
덧글을 썼다 지웠다 하면서 내용을 수정하고 덧붙이다보니 거의 짤막한 글 한 편 분량이 되어버렸네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닌데, 초반에 톰이 식당에 들어가 믹(요리사)의 예전 여자에 대한 잡담(이지만 뒤에 펼쳐질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어쩐지 섬뜩해지는 말)을 나눈 후 믹이 "Nobody's perfect, Tom." 이라고 하자 톰이 "I guess not." 이라 대꾸하는데, 이걸 "그렇겠지." 라고 번역해야 맞나요? 아니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번역해야 맞나요? 이 영화의 대사들이 워낙 간결하다보니 다른 건 한글 자막 없이도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데 저 부분만 지독하게 헷갈린단 말이죠.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23 17:05
파인로 / 제가 세상에서 열다섯 번째로 싫어하는 사람이 저한테 영어 물어보는 사람입니다-_- 몰라요 몰라요. 지금 "You get jaded, but you forget the magic of cinema that you can actually build something."도 jaded를 잘못 옮긴 거 아닌가 확신이 안 서서 조마조마하고만(오역인 건 맞는데 오역이라면서 실은 이거다 했는데 그 '이거'도 아니고 '저거'면 어떻게 하지 OTL). 부정의문문에 대한 대답과 마찬가지로 "그렇겠지."라고 옮기는 게 맞을 거라는 사실을 저는 몰라요. 물어보지 마세요. 영화는 쥐뿔 만큼 알지만 영어는 쥐뿔도 몰라요. (이런 젠장 나 복학 어떻게 하지)

긴 덧글을 붙이시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사실 (뛰어난 영화들이 보통 그렇지만) [폭력의 역사]는 한 편의 글을 쓰려고 할 때 핵심 줄기 자체는 무척 간결하고 확실히 드러나나 그걸 간결하고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디테일들은 굉장히 다양한데, 그 디테일을 다 쓰자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영화를 다시 보는 게 나을 테고, 그렇다고 핵심만 말하자니 워낙 선명하고 간결해서 별로 할 말이 없는 데다가 영화 안 본 사람들이 '뭐여, 별 거 없구만' 할 것 같고, 그런 딜레마 속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은 적당하다 생각하는 측면에서 절충을 하는 수밖에 없는 듯한데, 그렇다고 하여 언급하지 못한 요소들이 의미 없는 건 결코 아니니까(심지어 전 섹스 장면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안했죠), 파인로 님의 것과 같은 덧글들을 통해서 피드백을 하는 게 영화의 이해를 훨씬 풍성하게 해주고 영화에 대한 예의도 제대로 갖추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요 (_ _)

비고 모텐슨의 연기는 말씀하신대로 경이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앗, 저 사람은〈반지의 제왕〉에서 멋있게 나왔던 신인 배우!'(사실은 갖가지 영화에 크고 작은 조연으로 출연한 베테랑입니다만^^;)하는 시각으로 보셨던 분들은 경이와 경악을 넘어서 혹시 저 자가 계왕을 따라 시간과 정신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것인가 하는 의심을 품으셨음직도 합니다. 지금보다 식견이 좀 좁았던 시절에는 에너지를 열심히 밖으로 내뿜는 연기가 가장 뛰어난 연기라고 생각했는데(그게 연기 잘 하는 걸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이제는 점점 더 이런 유형의 연기에 감동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근데 솔직히 이런 식으로 연기를 하면 캡처하기는 참 힘들어요. 톰과 조이 사이에 경계를 그어 놓고 그 선 양쪽을 0.5초마다 0.1mm씩 왔다갔다 해서 한 개의 짧은 쇼트를 캡처할 때도 타이밍에 따라 인상이 완전히 달라져버리더군요. 솔직히 이번 글에 쓴 캡처는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더 어떻게 해볼 자신이 없어서 그냥 올렸지만.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구조상 버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물론 대단합니다. 본문 도입부에서 열심히 묘사를 해본 출근길 장면도 그렇습니다만 '사실 별 의미는 없는 부분인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의무적으로 찍은 부분'이 안 보이죠. 매 장면이 플롯을 전개하는 기능과 인물을 심화하는 기능을 모두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 물론 필라델피아 갱들과 총격전 벌이는 장면 전체가 좀 중심에서 빗겨나 있다고 지적하시는 분이 계시면 그거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겠지만요. 하여간 그런 맥락에서 크로넨버그는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피칠갑' 인상과는 달리 지극히 고전적으로 정제된 감독들을 떠올리게 해요. 이를테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Commented by 수집 at 2007/11/24 01:37
혹시나 쓰시지 않을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금요일밤, 아니 토요일 새벽에 로또맞은 기분이군요.(부담스러우시다면 로또 3등쯤? 후후)
섬세한 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비고 오라버니 연기는 반지의 제왕덕에, 혹은 반지의 제왕때문에 과소평가 되는 일이 많더라구요. 그게 왜 그렇게 섭섭한지요.
다운받았다 지우고 다운받았다 지우고를 몇번이나 반복하고 결국 아무것도 보지않고 듣지 않은 상태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던 날, 극장을 나와서 스스로를 칭찬하는 의미로 친구와 아주 비싼 저녁을 먹었답니다.
Commented by kiekie at 2007/11/24 04:31
공들여 쓰신 리뷰 잘 봤습니다. 영화 보고 싶네요:-)
Commented at 2007/11/24 07: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lunanium at 2007/11/24 13:35
비고의 연기만큼 감동적인 리뷰, 너무 감사드립니다. 폭력의 역사 디븨디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인데, 빨리 보고싶어 지네요ㅠㅠ 멋진 리뷰,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25 23:05
수집 / 좋다좋다 말만 했지 개봉 당시에 관객 동원에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크로넨버그 감독님께 내심 죄송스러워 하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DVD라도 팔아드려야겠다는 일념 하에 무리를 좀 했습니다.

비고 모텐슨 출연작은 은근히 많이 소개가 되었지만 역시 몸 값 비싼 스타 배우들에게 가려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싶습니다. 이제 〈반지의 제왕〉 덕분에 얼굴 알아보는 이도 많이 생겼고, [폭력의 역사] 덕분에 자리만 잡아주면 기가 막힌 연기를 펼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만큼 앞으로의 경력이 멋지길 기대해 봅니다. 사실 '위대한 배우가 되겠다' 이런 야심 없이 그냥 기분 가는대로 영화를 선택하는 걸로 알려져 있으니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비슷한 유형의 필모그래피를 만들어 갈 것 같기는 하지만요. 내년에 나올 영화 중에 에드 해리스가 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는 웨스턴 [아팔루사]라는 작품이 있던데 그거 기대하고 있습니다. 구체화되려면 한참 먼 것 같지만 실베스터 스탤론 감독의 [포]에서 에드거 앨런 포(!) 역을 한다는 소문도 마음에 들고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25 23:08
kiekie / 보고 싶으시면 보시는 편이 좋은 것입니다. 크로넨버그 감독 영화답게 96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무게감은 툭툭 털어버리고 '액션 스릴러'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아쉬울 것 없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25 23:10
비공개 / 고맙습니다. 수정했습니다. 컴퓨터로 글을 쓸 때쯤이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후인지라 실수들을 쉽게 지나치게 되는 편입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25 23:19
lunanium / 나름대로 공들인 보람이 있는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은 비고 모텐슨의 연기에 대한 과소평가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족한 어휘력으로 장면마다 스며 나오는 감흥을 재현하고자 하는 부질 없는 시도를 하다보니 영화를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영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자들의 곤란한 버릇이겠지만요.
Commented by SakuYoo at 2007/11/28 02:40
음.. 형님 드디어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28 12:01
SakuYoo / 사람이 DVD를 팔아볼라치면 뭔 짓을 못하겠니 -_-)/
Commented by marlowe at 2007/11/28 15:58
언제나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입니다.
문득 [폭력의 역사]의 부자관계가 [미스터 브룩스]의 부녀관계와 겹쳐 보이네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7/11/28 16:19
marlowe / 아, 그래요? 으으으 보고 싶다아; DVD 출시되면 사려고 했는데 가격이 예상 외로 비싸더라고요, 그 영화. 그래도 윌리엄 허트를 보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부녀관계라고 하시니 얘기하게 됩니다만 저는 요즘들어 [폭력의 역사]에서 딸 새라가 차지하는 위치/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도입부 식사 장면에서 톰과 잭 사이에 시리얼을 두고 벌어지는 약간의 신경전(이라고 하니 꼭 두 사람이 시리얼 먹으려고 다투는 듯한 느낌이;;)이 벌어질 때 새라의 쇼트가 한 번 끼어드는 게 약간 마음에 걸립니다. 아니, 걸린다기보다는 남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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