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들-2008년 1월 14일
 0. 내 '단'상들이 짧은 맛이 없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오늘밤엔 정말 짧게 써보리라!

 
 
 1. 서울에서 사흘 간 아홉 편의 영화를 보고 왔는데, 역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벨 페라라 영화를 연달아 여섯 편을 본 것이 충격이 컸다. 페라라 영화는 글로 옮겼을 때는 죄와 속죄, 구원, 선과 악, 등등 지극히 먹물 냄새 풀풀 풍기는 내용으로 가득한데도 실제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실하다. [Ms. 45(1981)]처럼 도저히 말도 안 될 것만 같은, 우습기까지 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조차도 정작 보고 있으면 정말 저런 일이 벌어질 것이리라는, 벌어지고야 말 것이라는 생생함이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도 그런 면에 있어서는 단연 마틴 스콜세지를 능가한다(혹은 마틴 스콜세지의 일부 영화만이 이 경지에 이르렀다). 대체 그 비결은 어디 있는 것일까? 이미 보았던 [Ms. 45]와 [악질 경찰(Bad Lieutenant, 1992)]은 물론이고 이번에 처음 본 네 편의 영화 ─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 2007)]보다 훨씬 감명 깊은 크리스마스 가족 영화 ['R X마스('R Xmas, 2001)], 데이빗 린치를 생각나게 하지만 내게는 훨씬 더 매혹적인 [블랙아웃(The Blackout, 1997)], [대부(The Godfather, 1972)]보다 더 좋은 영화라던 오승욱 감독의 호언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장례식(The Funeral, 1996)], 그리고 크리스토퍼 워큰의 윙크 한 방만 봐도 알 파치노를 얕보고 싶어지는 [뉴욕의 왕(King of New York, 1990)]까지, 모두 하나하나 가슴 깊이 새기고 싶다. 비타협적으로 거대 자본 밖에 나가서 만드는 독립 영화가 필요한 이유를 처음 느꼈다. 올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추진 중이라는 할 하틀리 감독 특별전도 기대하게 됐다. 미국 독립영화계에 끊임없는 애정을 보여왔던 어느 선배의 말을 그 동안 그러려니 하고 들어왔건만 이제는 이 영역에 진지하게 덤벼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2. 프랭크 다라본트의 신작 [안개(The Mist, 2007)]는 흥미진진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보다가 본격적으로 피가 튀는 순간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행복해서. 아직도 이런 영화가 나오는구나 싶어서. 그리고 그 기분을 거의 끝까지 유지할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결말이 (언뜻 보기에는 계속 암울한 척 해도) 영화 전체의 시선과 톤을 배반하고 있어서 안타깝기는 했지만 작년의 [용감한 자(The Brave One, 2007)]처럼 중반까지 괜찮게 나가다가 점점 말아먹더니 어리석은 결말로 관객의 울적함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거의 끝까지 훌륭하게 나가다가 막판에 한 번 삐끗한 정도라서 마음 상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이야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에서 곧잘 만나게 되는 의무적 해피엔딩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넘기면 될 일이다(그래도 '사실은 그것은 스튜디오의 압박으로… 감독판 엔딩은 따로 있소이다!'면 좋겠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아무리 뒤에 앉아있던 커플이 상영 시간 내내 헛소리를 지껄였어도 하여간 정말 기쁜 경험이었다. 올 한 해 영화 운이 지금까지 정도만 되면 정말 좋겠다. [아메리칸 갱스터],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안개]. 이런 식이면 일반 극장도 계속 찾고 싶지.

 참, 엔딩 크레딧에서 그레고리 니코테로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환호했다.



 3. 독립 영화 감독 + 그레고리 니코테로 하니 절로 조지 A. 로메로 감독이 떠오른다. 올해 드디어 공개될 다섯 번째 시체 시리즈 [시체들의 일기(Diary of the Dead)] 예고편이 떴다(그런데 이 번역은 어색하다. 그렇다고 '~의'를 포기하면 다른 작품들과의 통일성이 훼손되고. of를 한 방에 대체할 한국어가 없으니).


 예고편을 봤을 때 이번 주 [FILM 2.0]에 실린 [클로버필드(Cloverfield, 2008)] 기사가 생각났다. 역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Redacted(2007)]도. 미국 영화는 우리 시대 이미지의 속성을 굉장히 첨예하게, 적극적으로 좇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뭐 미국 영화만 그러나? 싶기도 하지만 적어도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태도다. 그러고 보니 전세계 어디보다도 폰카가 일반화되어 있을 나라가 바로 이곳인데 좀 의외다. 휴대폰과 거기 딸린 카메라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가 드물다. 그걸 거창하게 영화의 주제로 삼는 작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수퍼맨 돌아오다(Superman Returns, 2006)]에서 사고 현장의 수퍼맨을 열심히 찍던 시민들의 모습이 주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아무튼 기획 자체가 참신할 순 없게 됐지만 로메로 감독님 영화니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안개]보다 조금 더 큰 기쁨 안겨주시길 기대해도 될까요, 감독님?



 4. [FILM 2.0] 이번 주 기사에 따르면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2007)]는 3월 개봉 예정. 골든 글로브에서 재미를 본 조 롸이트 감독의 [속죄(Atonement, 2007)]도 2월에 개봉한다고 하고,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신작 [찰리 윌슨의 전쟁(Charlie Wilson's War, 2007)], 간절히 기다려온 웨스턴 [유마 행 3시 10분(3:10 to Yuma, 2007)], 하도 좋다고 해서 관심 갖게 된 [주노(Juno, 2007)] 등도 자리를 잡은 듯하여 기쁘다.

 반면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동방의 약속(Eastern Promises, 2007)]은 올 하반기 개봉 예정. 날짜 확정도 안 됐고 그나마 하반기라고 하니 또 불안하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피가 있으리라(There Will Be Blood, 2007)]는 이런저런 수상식에서 인기 있다는 소식만 들릴 뿐 우리나라엔 수입도 안 됐나보다. 그리고 또 간절히 보고 싶은 영화 중 시드니 루멧 감독의 신작 [당신이 죽었음을 악마가 알기 전에(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2007)]는 아예 잡지 기사에 단신으로나마 언급조차 안 되고 있어서 생각할 때마다 좀 절망스럽다(코드 1 DVD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회사인 Image Entertainment에서 나올 예정이던데). 이상 세 편하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현재 가장 보고 싶은 '4대 천황'이건만 아직은 1/4의 기쁨뿐이로구나. 또 이 세 편 정도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하여간 무척 궁금한 웨스턴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The Assassination of Jesse James by the Coward Robert Ford, 2007)]도 전혀 소식이 없다. 더욱 분발해주세요, 수입/배급사 여러분.



 5. 쳇, 30분 내에 써서 올리고 자정 전에 자려고 했는데. 오늘도 실패다. [뉴욕의 왕] 속 크리스토퍼 워큰 형님께 감화 받은 기념으로 Fatboy Slim의 "Weapon of Choice" 뮤직비디오로 성급히 마무리. 빨리 자야한다.

by sabbath | 2008/01/15 00:31 | 살아가며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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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번주 필름투에 실린 개봉 예정작 날짜들.
이번주 필름2.0에 실린, 수입작들의 개봉 예정 날짜들. 궁금하던 영화가 워낙 많이 눈에 띄길래 정리해봤습니다. – 인디아나 존스: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 5월 22일 다크 나이트 - 8월 7일 헬보이2:The Golden Army - 8월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 11월 21일 나니아 얠.....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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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Ginger at 2008/01/15 00:55
저는 [Ms. 45]와 [뉴욕의 왕], [악질 경찰]을 보았습니다. 3편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이 컸어요. 원래 그 세 편만 보고 이번에 상영되는 아벨 페라라 영화는 넘기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장례식]과 [블랙아웃] 마저 보려구요.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강력추천한 ['R X마스]를 놓쳐버려서 후회가 큽니다만, 언젠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겠죠.. 집에 좀 늦게 들어가더라도 보고 나올걸 그랬나봐요. 그리고 페라라 감독이 오지 못한 게 너무 아깝네요. 나중에0 시네마테크에서 페라라 감독 한국 방문을 재추진할거라고 믿습니다. -_-; 그나저나 아래에 끼워두신 뮤직비디오 제가 참 좋아하는 비디오인데, [뉴욕의 왕]을 보고 난 후 보니까 느낌이 매우 새롭네요 -_-;;
올해는 연초부터 해외 화제작들이 국내에서 개봉 확정되는 일이 많아서인지 괜히 매우 풍족한 한 해가 될 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Commented by 예하 at 2008/01/15 01:05
어머, 4번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왔는데요(..)
여튼, <이스턴 프로미시즈>가 하반기 개봉예정작이라니요! 저만 모르고 있었대도/저만 좋은지 몰라도 좋습니다T_T으악!
전 솔직히 수입 자체에 비관적이었거든요. 그래서 개봉예정작 소리만 들어도 좋은게지요(...)
여튼, 이미 어둠의 경로로 구해 보신 분들의 평도 속속 날아들고 있네요-.-..
<폭력의 역사>보다 좋다는 사람도 봤는데 그 분과 저는 원래 취향이 영 안 맞아서. 여튼, 네. 너무 좋네요. 흑흑.

아 그리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2월 21일 개봉이라고 들었어요. '확정'이라는 말 까지 붙여서요! 야호~
Commented at 2008/01/15 12: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한군』 at 2008/01/15 18:20
[노인을 위한 나라]에 대한 격찬이 하도 많아서 궁금했는데 개봉한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건 그렇고, 작년에 개봉 했어야할 [플래닛 테러]는 도대체 어디로!!!
Commented by 오즈 브뉴엘 at 2008/01/15 19:00
저도 오늘 <미스트>보고 왔는데 좋아죽는줄 알았습니당,,ㅋ
전 이 영화의 결말이 정말 굉장하다고 생각 합니당,,
약국에서의 처절하게 소름끼치는 장면들도 너무 좋았고,,
개인적으로 요 근래 에 본 영화중에서의 가장 처절한 마지
막 장면이 아니었나 생각되네요,,
Commented by 날씬이 at 2008/01/15 21:35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주노
유마행 3:10분
속죄
가 모두 2월 21일 개봉이라던데요. 소사소사 맙소사.

전 이번주에 필름2.0말고 씨네21을 샀는데...
혹시 거기 정성일 평론가가 장률 감독의 <이리> 촬영현장기 쓴거 보셨어요?
세상에 어떻게 하면 그런 글을 쓴데요?
전 키노세대가 아니라서 드문드문 이 사람의 글을 읽은편이었거든요.
구로사와 아키라감독의 부고의 부치는 글을 보고 글을 정말 잘 쓰는구나 느끼긴 했는데, 이번에 컴백작도 찐하더라고요.
뭐랄까.. 무엇보다 영화에 들어가지 못한 현재 처지를 상기하면서도..쉬워진 듯 하면서도 여전히 꼬챙이로 하나하나 파고드는듯한 문체가 대단대단^^

Commented by Q at 2008/01/16 14:37
새벗님 짧게 쓰시지 않아도 상관 없는데요 ^ ^ [미스트] 의 결말이 "원래의 시점에서 벗어났다" 는 평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흑사회] 영어 리뷰를 딴데다 올렸는데 관심 있으시면 한번 체크해보시고요... [흑사회 2] 도 올라갈 예정입니다.

http://english.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rticle_class=6&no=381472&rel_no=1

제가 좀 몸을 다쳐서 듀게에 자주 못나오고 있었습니다. 혹시 어디 갔는지 궁금하셨다면 그래서 입니다 ^ ^

잘 읽었어요 그럼 또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1/17 13:08
아벨 페라라 영화들이 매진되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이번 영화제는 특히나 인기가 좋더군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1/18 11:47
Ginger / 며칠이 지난 지금도 페라라 감독의 영화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요. [장례식]과 [블랙아웃]은 또 좀 다른 형식의 영화들인데 어떻게 보셨을지 궁금합니다. ['R X마스]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어요. 이번에 본 작품들 중에서 [뉴욕의 왕]과 더불어 가장 깊이 와 닿았습니다. 아벨 페라라가 저런 영화도 만드나 싶을 정도로 따사로운 가족 크리스마스 영화였습니다. 약 팔아서 이웃들을 구제해주는 산타클로스 가족을 또 다른 산타클로스가 구제해주는;

페라라 감독 방한 취소는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영화를 한 편씩 보다 보니 점점 더 아쉬워지더군요. 비서가 "어떻게든 만회할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편지에 썼으니까 다음에 만날 기회가 생기리라 믿어봅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이번에 온 프린트 상태가 어마어마하게 좋아서(물론 [Ms. 45]는 불그죽죽했지만), 아벨 페라라 감독 방한 재추진 대신에 저 프린트들을 달라고 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1/18 11:56
예하 / 엣헴, 으흠, 어허, 에오, 아아, 그러니까,

저 이 글 쓴 다음 날 [동방의 약속] 봤습니다.

가능하다면 냉정한 감상문 내지 소개글을 써 볼 생각도 있습니다만 하여간 일단 제 첫 인상은 [폭력의 역사]처럼 위대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DVD가 좀 심심하게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실망도 했는데 직접 영화를 보고 나니까 음성해설의 대가 크로넨버그 선생님께서 굳이 음성해설을 하지 않으신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물론 흥미로운 점은 많이 있고 훌륭한(기겁할 만한) 장면들도 있고 배우들 연기며 기술적 통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뛰어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모양새를 되짚어 보았을 때 '이걸 (굳이) 크로넨버그 선생님께서 만드셨다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몇 번 더 보고 할 수 있으면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1/18 12:05
비공개 /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신대로 GV 일정 취소 때문에 상영 시간이 붕 뜨기는 했는데 오히려 그 시간에 영화와 떨어져서 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주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평소 같이 영화 보던 친구들이 여럿 와서 잡담도 하고 자기도 하고 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페라라 감독 영화의 배우들이 참 좋더군요. 단역으로 많이 나오는 히스패닉, 중국계 배우들도 상당히 매력이 있었습니다. 배우들이 좋다기 전에 페라라 감독의 영화가 배우들에게 많은 자극을 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도 [안개/미스트]의 엔딩 크레딧 읽다가 그 부분에서 앗차, 했는데요, 아마 [괴물]과 [판의 미로] 포스터는 영화 맨 첫 장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요? 주인공이 영화 포스터 그리는 사람이니까. 그냥 추측일 뿐입니다만. 그리고 [헬보이] 만화책은 나중에 약국에 갔을 때 주인공이 맨 먼저 아들에게 갖다 주겠다고 한 만화책부터 챙기잖아요? 그 때 챙기는 만화책이 [헬보이]라더군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1/18 12:07
『한군』 / 안 그래도 [플래닛 테러]는 며칠 전에 영상물등급위원회 홈페이지에 가 보니 심의 통과 했더라고요. (상영 시간을 보니 물론 무삭제고요) 슬슬 개봉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폭력의 역사]를 1년 동안 기다릴 때는 안 그랬는데, 이 영화는 어떤 꼴의 영화일지는 대충 다 아는 판국에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노라니 좀 지치는 감이 있네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1/18 12:24
오즈 브뉴엘 / 으음. 따로 포스팅을 해야 할지 그냥 덧글로만 달아야 할지 좀 고민을 했습니다. 그만큼 다시 보고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한 번 하고 싶은 영화이긴 한데, 다시 극장에 보러 갈 기회가 있을지 어떨지 모르니 일단은 덧글로^^;

[안개]의 결말은 물론 처절하기는 한데요, 저는 처절하다고 해서 좋은 결말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영화 전체는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고자 하는 자존감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그래서 작년에 읽었던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막판에 가서 '그래봤자 니들은 세상 속의 한줌 버러지야. 노력해 봤자 그딴 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 자신의 태도를 배반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사상이 제 세계관과 어긋나는 것도 사실이지만(아무래도 저는 하워드 혹스 팬이니까요^^;) 윤리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없다를 떠나서 영화의 태도를 흐려 버리는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 영화를 보고 나서 애인과 엔딩에 대해서 꽤 길게 토론을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끝냈어야 가장 효과적이었겠느냐, 하는 질문에 답하기가 좀 어렵긴 하더군요. 그래서 어쩌면 사상적 일관성을 다 떠나서 일단 상업 영화로서 임팩트 있는 결말을 만들기 위해 선택한 전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 쏴죽이고 땡, 이러는 건 요즘 같은 시대에는 퍽 심심하게 느껴졌을 테니까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1/18 12:27
날씬이 / 모두 2월 21일이라니;; 지옥 같은(제게는) 개강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타올라 보거라, 뭐 이런 계시일까요.

[이리] 촬영현장기는 읽지 못했습니다만 예전에 쓰신 [취화선] 촬영현장기도 상당히 울림이 있는 글이었지요. 그런데 여담이지만 아마 정성일 평론가 글이 쉬워지진 않았을 거예요. 원래 촬영현장기나 인터뷰는 좀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쓰시는 편이었어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1/18 12:37
Q / 아 뭐 저도 글은 길게 써야 읽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살긴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Q님처럼) 짧으면서도 읽을 만한 게 있는 글을 도저히 못 쓰겠어요. 그래서 해본 소리입니다. 하여간 잘 안 되네요. 매번 길이 때문에 '아, 나는 통 안 되는구나'하고, 쓰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아, 나는 역시 안 되는구나'하노라니 참… (블로그 운영 초기에는 굉장히 빠르게 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겁이 없어서 그랬나;;)

오마이뉴스에 글 쓰시는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읽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Q님 병환, 전 찬성 못합니다. 더 많은 리뷰를 위해서라도 의무적으로 나으셔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어서 〈우리는 미국 영화를 jotto 모르고 있다〉 시리즈를 연재해주셔야죠^^

…반쯤만 진담이고요, 아무튼 속히 쾌차하시길 기원합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1/18 12:40
marlowe / 아벨 페라라 영화를 사람들이 꽉 찬 극장에서 보고 있노라니 정말 이상하더라고요. 특히 첫 회 보고 나와서 다음 회를 기다리는데 로비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모습을 봤을 때요. '이상하다. 이 사람 영화가 이렇게 만장일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 같은데; 첫 회 본 사람들이 몽땅 남아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아벨 페라라 감독의 GV 낚시질 여파도 크긴 했겠지만요. 주말 지나고 있었던 상영은 어땠는지 궁금해집니다.
Commented by sesism at 2008/01/22 14:37
동영상 잘 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순전히 워큰 때문에 <킹 뉴욕>과 <퓨너럴>을 한번씩 더 보았는데 그 좋았던 느낌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딕션>까지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더랬어요.

그런데 sabbath님 이두용 감독님 영화 상영했던 지난 주말은 못 뵈었던 것 같아요. 영화 정말 좋더라구요. 뭐 하나를 꼽을 수가 없는데 <피막>의 경우는 남궁원씨 이야기가 거의 독립적인 하나의 멜로라고 봐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동방의 약속> 개봉 시기도 늦고 확정도 안되어 마음 아프시겠네요. 저는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밥 딜런이 어서 보고 싶은데 밀린 필름 2.0에서 내년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하여 설마 설마 했는데 호수를 확인해보니 368호 신년호더라구요. 정말 내년 상반기나 볼 수 있을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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