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알아? 다 안다구? 그래, 다 알 수도 있겠지. 뻔한 얘기니까… 근데 다 알면서 어디 있었는데. 내가 미쳐갈 때 니들은 어딨었어?"

 / [지구를 지켜라!(2003)]

 글을 [지구를 지켜라!]의 대사로 시작하는 것은 지금 이야기할 [십자군 이야기]가 뻔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며, 그래서 제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 작품을 대하실 경우 뻔하다며 외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이 글을 다 읽고 [십자군 이야기]가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께서는 다시 한 번 저 대사를 읽어보시면서 (영화를 보신 분들은 들어 보시면서) 생각해보셨으면 좋겠군요.

 [십자군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를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제시해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배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걸 인지하면서 사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요? [십자군 이야기]는 바로 그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십자군 이야기]는 그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중세 십자군 전쟁의 발단과 그 전개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먼나라 이웃나라] 타입의 교양만화라고 해둡시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예로 들자니 좀 꺼려지긴 합니다만.) 중요한 건, 이 책이 노골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통해서 김태권 씨는 오늘날의 미국 제국주의로 인한 이라크 전쟁을 조명합니다. 은유적인 장치를 넣어 은근슬쩍 생각나게 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까죠. 각종 자료들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고, 시간 흐름을 무시한 풍자적 상상력도 동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마틸다 백작 : 아무튼 이 전쟁의 정치적 동기 첫번째는, 교황청 권력의 강화입니다.

 아데마르 주교 : ?!

 마틸다 백작 : 이해가 잘 안되시면,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 공화당 매파의 위상이 강화된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데마르 주교 : 그렇군요! 전쟁을 시작하면 보수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커진단 말이죠!

 이와 같은 정치적 메시지를 함유하는 작품의 경우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그 입장의 정당성입니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작가의 주장에 동조하게 할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죠. 물론 어디서나 비판적 독서는 필요합니다만 애초에 주장 자체가 아무런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좃선일보 사설이랑 다를 건 없습니다.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lumbine, 2002)]과 [멍청한 백인들(Stupid White Men)]이 매력적인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의문 제기와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자적 편집을 통해 다소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긴 하지만, 그런 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 역시 마이클 무어의 기본 주장을 폄하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김태권 씨의 [십자군 이야기] 역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십자군 전쟁에 대해 빈약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가고 있고, 그 이야기의 출처들 역시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정당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작가 스스로 제시하는 의문 역시 객관적인 사실들을 바라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던질 수 있을 만큼 정당한 의문들이고요. (하기사, 부시 행정부를 까는 건 언제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독자는 300여 쪽에 달하는 글씨 많은 이 만화를 어렵잖게 읽어나갈 수 있으며, 아마 그 중 상당수는 이 작가의 입장에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십자군 이야기]는 복잡해 보이는 사실을 차근차근 따져가며 쉽게 풀이하고 그것을 통해 독자에게 의식적 변화를 준다는 교양만화로서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하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1권의 부록으로 들어가 있는 [제노사이드의 심리학]이라는 만화입니다. 작가가 직접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30여 쪽 분량의 만화는 본문에서 언급된 십자군의 학살극을 토대로 제노사이드, 즉 민족에 대한 대량 학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역시 들어둘 만한 힘이 있는 건 당연하고요.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와중에 여러 가지의 참고할만한 책을 추천하는데, '주석 달린 텍스트'로서의 힘 역시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특히 [제노사이드의 심리학] 중 세 번째 파트인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에서는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제노사이드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위치에 서 있지 않느냐고 물음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십자군 이야기]는 부시 행정부의 정신나간 행위 이후 쏟아져 나온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책입니다. 주장의 정당성과 내용의 대중성, 그리고 전체적인 작품성까지 고루 갖추고 있는 작품이죠. 그러니 저로서는 이 작품을 추천할 수 밖에요.



 덧. [십자군 이야기]는 김태권 씨의 홈페이지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홈페이지에는 [십자군 이야기]외에 그의 다른 만화들도 있고요. 하지만 [십자군 이야기]는 출판본을 사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출판본에는 통신 연재본 외에도 로마 시대부터 십자군까지를 다룬 프롤로그 격의 만화가 60여 페이지 분량으로 들어있고, 앞서 이야기한 [제노사이드의 심리학] 역시 출판본 부록으로서 추가된 거거든요.
by sabbath | 2003/12/21 11:52 | 도서 감상문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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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JOSH의 험난한 세상 at 2003/12/24 17:49

제목 : '십자군 이야기 - 충격과 공포' 1권 (2001,..
<font size=3 color=blue>링크 : [만화] “우리는 김태권을 ‘발견’했다” : 문화 : 한겨레21</font> (프레시안은 안 가지만) 두고보자에 실린 맛배기 보고도 재미있어했던 차라 퇴근길 서점에 갔다가 나왔길래 잡아보고... 너무 재밌어서 사왔습니다. 올해 한국 만화 중에 최고 걸작으로 뽑고 싶습니다. (마린블루스는 유감...) 아... 죽여주는 독설과 썰렁유머가 아주 조화스럽습니다. 그림도 맘에 들고요... 하지만 K2제독킷 공부하신 분은 아시겠지만 해독제도 독이라 해독제의......more

Commented by shine at 2003/12/21 12:35
오호... 이라크 전쟁이 십자군과도 연결이 되는군요.. ^^
Commented by 염맨 at 2003/12/21 16:26
멍청한 부시 스스로가 이 전쟁에 십자군을 끌어대기도 했습니다. 부시의 끝 간데 모를 무식함
Commented by 질투가면 at 2003/12/21 20:15
훌륭한 작품이죠 이 만화 >_<b !! 이원복씨외엔 제대로 된 작가를 찾아보기 힘들던 교양만화계의 새로운 희망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정치적 주관이 너무나 뚜렷한 이 작가가 앞으로도 교양만화를 계속 그리려 할지는 조금 의문이지만요. 아니 그전에 '십자군이야기'가 교양만화로 분류될 수 있는가도 조금 헷갈리긴 합니다만...-_-
Commented by sabbath at 2003/12/21 20:36
shine / "우리의 역사적 책임은 테러를 응징하고 악의 세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미국이 벌일 21세기 첫 전쟁은 십자군 전쟁이다." - 조지. W. 부시

"부시의 십자군 발언은 그 잔혹한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십자군이 종교적 열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멍청함도 보여주는 것이다." - 귄터 그라스

질투가면 / 예.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라』와 비교하는 걸 좀 꺼렸지요. 정치만화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앞으로도 이런 만화를 그릴 거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어차피 『십자군 이야기』 전에도 만화를 그려오던 사람이고요.
Commented by 프리스티 at 2003/12/22 00:48
연재 초기 부터 프레시안에서 즐겁게 읽었습니다만, (DC에서도 연재 되었었지요.) 너무나 색깔이 뚜렷한게 더 많은 독자들을 끌여들이기 힘든 요인이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되더군요.
Commented by 슈리아 at 2003/12/22 21:55
이슬람 쪽에서는 그에 맞서 "지하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게 뭐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껄껄- (제노사이더. 저 단어만 들으면 루갈님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인 제노사이더 커터밖에 생각이 안 난단 말이야. ...이것도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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