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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 일군의 영화인들이 음반사 사장의 자본을 가지고 영화 [춘향전]을 찍는다. 때는 어느 화창한 봄날. 몽룡의 아버지가 남원 사또직에서 내직으로 승차하게 되자 몽룡과 춘향이 면경과 옥가락지를 교환한 뒤 이별하는 장면을 촬영코자 준비 중이다. 몽룡 역을 맡은 배우는 시나리오를 들고 정자 밑을 오가며 자신의 대사를 연습하고, 다른 스탭들도 저마다 촬영 준비로 분주하다. 그러나 춘향 역을 맡은 배우는 좀처럼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감독 이하 모두가 한참 발을 동동 굴리며 기다려 보지만, 배우를 찾으러 보낸 이들은 허탕만 치고 돌아온다. 결국 한 개의 쇼트도 찍지 못한 감독은 성을 내며 (일본어로) 외친다. "오늘은 여기서 마쳐!" 스탭들은 벌려두었던 장비를 모아 힘없이 촬영현장을 떠난다. 카메라는 그런 그들의 뒤에 서서 함께 자리를 뜨는 듯하더니 계단 꼭대기에 이르러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다만 터덜터덜 계단을 밟는 영화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만 본다.
1941년 이병일 감독이 만든 [반도의 봄]을 완성도 높은 영화라고 말하려면 아무래도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나온 다른 영화들에 비하여",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영화 제작 환경을 감안할 때" 등등 몇 가지 단서를 붙여야 할 것 같다. 물론 종종 아찔할 정도로 감탄스러운 순간들이 눈앞에 펼쳐지지만 전체 플롯은 다소 헐겁고, 대화 장면은 (실제 40년대의 조선인들이 그런 식으로 주춤주춤 머뭇머뭇 대화를 했는지, 아니면 배우 다루기와 편집의 미숙함 때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늘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 하나 없이 촬영현장을 떠나는 영화인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지켜보는 이 하나의 쇼트만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가 된 듯 굉장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이 쇼트만으로도 [반도의 봄]은 이루고자 한 바를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 ![]() 그 때 멈춘 것, 즉 저 멀리 펼쳐진 경성의 시가지와 멀어져가는 영화인들을 처연히 바라보는 주체는 물론 계단 끝머리까지 카메라를 밀고 있었던 [반도의 봄] 스탭들이다. 영화의 창작이란 그토록 물리적인 것이기에, 이 쇼트의 프레임 바깥에 있었을 또 한 무리의 조선 영화인들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찍는 조선인들이 허탕을 치고 촬영 현장을 떠나는 모습을 담은 영화를 찍던 일제강점기의 조선 영화인들은 대체 어떠한 심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합숙소 집세는 6개월 치가 밀렸고, 투자자는 도움 주기를 꺼리고, 영화는 찍고 싶으나 기약 없는 미래 속에 주연 배우가 떠난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찍고 싶은 건 [춘향전]이지만 그 영화를 완성하는 일은 범죄를 저지르거나 "내선일체"의 기치를 내걸 때만 가능하다. 현장을 떠나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거나, 혹은 현장에 남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선 영화인들은 두 무리로 분열된 채 한쪽은 떠나고 한쪽은 응시하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 21세기의 우리야 스크린 밖에서 점잖게 팔짱낀 채 낯선 톤의 연기들에 가끔씩 캠피한 웃음도 보내주시면서 안전하게 거리를 둔 뒤 이것은 친일이다 아니다 판단이나 할 따름이겠지만 그 때 스크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 가다 멈추는 발걸음이란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슬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어찌어찌하여 마침내 영화를 완성하고 개봉 당일 관객들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걸 보노라면 이 영화인들도 잠시 그 결과물을 얼싸안고 기쁨을 누릴 법 하건만, [반도의 봄]은 완성된 [춘향전]이 극장의 스크린 안에 영사되고, 다시 그 빛을 관객들의 얼굴로 쏘아 보내는 극장 체험의 숭고한 황홀경에는 단 한 번도 눈길 줄 생각을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고생하여 만든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반도의 봄]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느슨한 멜로드라마 플롯을 어떻게든 끝맺으러 간다. 영화를 그만 둔 "모던 걸" 안나(백란)와 이제 막 영화를 시작한 "전통적" 여인 정희(김소영)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작자 영일/에이이치(김일해))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 멜로드라마는 지나치게 무리수를 두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설득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영일과 정희 같은 한 쌍의 선남선녀가 여러 장면을 통해 서로를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응당 두 사람 사이에 남모를 애정 관계가 꽃피고 있겠거니 해주는 것이 마음씨 고운 관객의 도리이긴 하겠지마는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아름답게 펼쳐진 봄날의 풍광 속에서 에이이치를 향한 격렬한 애정을 표현하는 안나의 모습 쪽에 영화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좀 더 끌리는 걸 어쩌겠는가. 게다가 이후에는 사비를 털어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고, 병실을 잡고, 나을 때까지 간호까지 해주는데 응원해주는 것이 당연한 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말미에 이르러 [춘향전] 연출자인 허 감독(서월영)이며 정희의 동거인 경숙 씨(복혜숙) 등이 등장하여 정희의 끓는 가슴을 편들면서 더러는 달래고 더러는 꾸짖어 결국 안나의 입으로부터 "저는 영일 씨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여자예요."라는 말을 받아내고 말 때, 그건 멜로드라마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결국 그 시대 조선 땅에서 기업 자본에 의존한 영화를 만들어버리고 만 아픔을 어떻게든 달래보기 위한 안간힘처럼 보인다. 그것이 영화 안의 논리 속에서 억지인 줄은 알겠지만 결국 영화라는 것도 스크린 밖의 사람들이 만들고 스크린 밖의 사람들이 보는 것임을 어찌하랴. 사요나라, 안나 상. 다음에는 이름도 한국인스럽게 지으시고 언어도 한국어로 쓰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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