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650호 "신세기 영화 베스트 10"에 대한 첨언
 오늘 아침 수도권 지하철 가판대에 깔리기 시작한 [씨네21] 650호는 창간 13주년 기념 특대호다. 이번 호의 특집은 뭐니 뭐니 해도 "감독․평론가 92인의 신세기 영화 베스트 10"이라는 기사일 것이다. 국내외 영화감독 및 영화 평론가 92인에게 1995년([씨네21]이 창간된 해)부터 2008년 3월 16일까지 발표된 영화 중 뛰어난 작품 열 편을 꼽아달라고 하여 그 목록을 57페이지(중간 광고 포함)에 걸쳐 실어둔 기사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92인 중에는 내 이름도 들어가 있다. 650호의 목차 소개 및 해당 기사의 머리말에 따르면 나는 "당신이 믿을 만한 친구로 생각하는 그"이며 "영화에 관한 글로 널리 알려진 블로거"인 셈인데, 민망한 일이다. 어쨌든 내가 내 목록 실어달라고 애원한 것은 아니며, 나는 다만 평소 좋아했던 주성철 기자님께서 말씀을 하시기에 [씨네21]과 주성철 기자님에 대한 팬심을 벗 삼아 설문에 응했을 뿐이니 '대체 너 같은 자의 목록이 왜 들어갔단 말이냐'라고 생각하시는 분께서는 이 블로그에 문의하시기 보다는 [씨네21]에 문의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독자 기고는 어디로 하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씨네21] 홈페이지에 가면 어딘가 루트가 있지 않을까 싶고, 대표 전화는 (표지에 적힌 바에 의하면) 02-6377-0500이라고 한다.

 그럼 이제 왜 내 이름이 거기에 들어가 있는가, 또는 그에 대해 항의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설명이 된 것 같고,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목록을 뽑아 보냈으면 보낸 거지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하겠나 싶기도 하지만 몇 마디를 하고 싶다. 긴 글을 읽으실 여유가 없는 분들을 위해 한 줄 요약하자면 : 주성철 기자님께 속았어요!

 기사를 읽으신 분들께서는 아시겠지만 이런저런 사람들이 꼽은 열 편의 영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만큼이나 재밌는 건 자신이 꼽은 영화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내 목록은 이러한 독자들의 재미를 무시하고 그저 영화 열 편만 꼽아둔, 재미없는 목록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이시라면 내가 얼마나 쓸데없이 말을 길게 하는지 아실 거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연말 Best 10을 꼽을 때도 영화당 두세 문단은 쓰는 인간이, 지난 13년간의 Best 10을 꼽으면서 설명 한 줄 안 썼을 리 있는가. 또, 다른 이들의 목록을 보면 열 편의 영화를 꼽는 과정에서 순위를 매긴 이가 있고 안 매긴 이가 있다. 나는 순위를 매겼다. 이럴 수가! 내가 Best 10 목록을 만들면서 순위를 매기다니!

 사정은 이렇다. 처음 관련 제안을 받았을 때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순위를 정하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영화 열 편을 꼽고, 그에 관한 에세이를 200자 원고지 기준 10매 분량으로 써달라는 것. 그러겠노라고 답을 드렸다. 그런데 이어 다른 메일이 또 와서, 지면 문제 때문에 에세이는 못 실을 수도 있으니 보류하되 대신 순위를 "꼭" 매겨주길 바란다고 하셨다. 간략한 멘트는 해도 좋고. 역시 그러겠노라고 답을 드렸다. 그리고 그렇게 썼다. 열 편을 꼽고, 각 영화에 대한 간략한 언급 대신 다섯 줄짜리 잡담을 달았다. 그 잡담은 편집됐다.

 OK? 꼭 순위를 매기고 싶어서 매긴 건 아니다. (추측컨대 지금 순위 없이 목록을 작성하신 분들께서는 제안을 받자마자 바로 열 편을 꼽아 보내셨던 게 아닐까. 나는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면서 며칠을 흘려보냈다) 영화에 대한 긴 설명을 쓰기 싫어서 안 쓴 게 아니다. 이 블로그의 운영자는 아무리 사적인 이야기를 쓰더라도 언제나 리더 후렌들리하게 쓴다. 그런데 심지어 잡지에 실릴 글인데 괜히 단조롭게 썼겠는가.

 별 쓸데 없는 목록이라는 식의 겸손은 잠시 집어치우겠다. [씨네21]을 읽으신 분들 중 몇 분 정도는 잡지에 실리지 않은 내용을 궁금해 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간고사 준비로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어디까지나 리더 후렌들리하게, 다시 한 번 Best 10 목록 나간다. 평소처럼 길게 써보고 싶기도 하고, DVD 캡처도 올리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01. [춘향뎐(2000)] - 임권택 : 다른 장면들도 물론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방자가 춘향 부르는 장면만으로도 이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 자연을 담아내는 경지가 아니라 자연을 연출하는 경지다. 이 이전이나 이 이후에 나온 영화들 중 다시 이와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02.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 2005)] - 데이빗 크로넨버그 : 크로넨버그는 언제나 나의 본성을 도전적으로 파헤쳐댄다. 아무리 과격하게 살을 찢고 피를 뿜어도(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다루는 질문들을 스크린 위에만 머물러 있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톰/조이의 가족들 모두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며 힘겨워했다. 혹은 이미 드러난 끔찍한 것조차도 모두 내 것으로 인정한 채 끌어안고 살아야만 한다고 되뇌었다.

03. [아버지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 2006)]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Iwo Jima, 2006)] - 클린트 이스트우드 : 각각의 영화들이 다루고 있는 전장 속 인물들의 모습도 물론 가슴을 뒤흔들지만 무엇보다도 한 공간에서 벌어진 하나의 전투를 기어코 두 편의 영화로 만들었을 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단 또는 예의가 나를 울린다.

04. [복수는 나의 것(2002)] - 박찬욱 : 완벽하게 통제되었다고 해서 걸작은 아니지만, 어쨌든 일단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통제된 영화 중 한 편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처음으로 영화 고유의 언어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그 언어들이 스크린 안에 머무르지만 않고 육신에 직접적으로 통증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나와 남의 몸뚱이를 뒤섞고 파괴하며 잘해 보려고 해도 결국 홀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슬프게, 너무 슬퍼서 때로는 거리를 두며 어떻게든 웃어보려고 애쓰기까지 하면서 보여주고 들려주는 영화.

05. [피를 부르리라(There Will Be Blood, 2007)] - 폴 토마스 앤더슨 : 자본과 종교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으로 도상화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무엇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게 만드는 세상에 던져진 사람으로서, 또 그 안에서 어떻게든 소유 자체에만 휩쓸리는 대신 다른 정신적 가치를 찾고 싶은 사람으로서, 이 기나긴 자멸극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걸 무시해도 괜찮은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렇기를 간절히 바란다.

06. [흑사회(黑社會, 2005)] / [흑사회 이화위귀(黑社會 以和爲貴, 2006)] - 두기봉 : 지극히 장르적인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또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는 경이로운 작품. 홍콩 반환에 대한 두려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80년대 홍콩 누아르 붐 이후 온갖 홍콩 영화들에 갖다 붙일 수 있는 비평적 클리셰가 되고 말았지만 나는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피부에 와 닿게 체험할 수 있었다.

07.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 하는 사적인 미국 영화 여행(A Personal Journey with Martin Scorsese Through American Movies, 1995)] - 마틴 스콜세지, 마이클 헨리 윌슨 : 물론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의 매혹과 열정을 가지고 극영화를 만드는 스콜세지를 좋아한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영화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다른 이들도 그 애정에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다큐멘터리 감독 스콜세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도 굉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이 체험해 온 미국 영화의 역사를 들려주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 전까지 모르고 있었던 많은 영화들을 소개해준 창구로서 가치 있는 작품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한 영화광의 초상을 담은 멋진 영화이기도 하다.

08. [무제(Untitled, 2000)] - 카메론 크로우 : 나는 영화에 충분히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결국 영화 언어에 민감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카메론 크로우의 영화 앞에서는 언제나 영화를 처음 보는 아이처럼 되고 만다. 그냥 매 순간 정신을 못 차린다. 혹자는 록 스피릿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음악에 별 조예가 없는지라 이 작품에서 인용하는 록 밴드며 곡들은 거의 모르는 형편인데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그건 그가 소년의 마음을 갖고 간절히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뭐든지 말해봐...(Say Anything..., 1989)],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 1996)],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 2005)]도 모두 그런 영화들이지만 [올모스트 페이모스(Almost Famous, 2000)] 극장판에 40분 분량을 추가한 이 작품이 가장 절절하다.

09. [절규(叫, 2007)] - 쿠로사와 키요시 : [큐어(キュア, 1997)]와 [회로(回路, 2001)]의 동어반복이라고? 하지만 이만큼 간절함을 담은 공포 영화도 없었다. 붉은 옷의 귀신이 주인공과 함께 침대 위에 앉았을 때 불현듯 찾아온 편안함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현대 사회 속 구성원들의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랄지 고독과 소외 등등의 뻔한 비평적 표현들은 한 방에 날아가고, 차라리 누군가가 내 잘못을 힘껏 미워해주기를, 또는 내가 잘못을 저지른 상대를 힘껏 기억할 수 있기를 염원하는 간절한 소망만이 남는다.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10. [짝패(2006)] - 류승완 : 이 작품이 10위인 건 [짝패]에 대한 애정을 강조하기보다는 앞으로 나올 류승완의 영화들에 대한 기대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올라갈 계단을 마련해 둔 셈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솔직하게 몸으로 다가가는 감독 중 한 명이며, 어떤 순간에도 활동사진의 활력을 잊지 않는 감독이다. 그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도 희귀한 자질이기 때문에 나는 매번 그의 다음 영화를 조마조마해 하면서(그가 갑자기 먹물스러워지면 어쩌나 걱정돼서), 또 두근두근하며(이번엔 대체 얼마나 즐거울 수 있을까 궁금해서) 기다린다. [짝패]는 지금까지의 완결판 같은 작품이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뻔한 목록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은 이 정도로 그만 두기로 하자. 사실 이 블로그의 맥락에서는 좀 재미가 없는 목록이다. 쿠로사와 키요시의 [절규] 정도를 제외하면 몇 번이고 언급한 작품들 아닌가. 자주 오시는 방문객 분들께 '과연 sabbath는 Best 10에 뭘 넣을까요?'라고 설문조사를 해봐도 저 목록이 나올 것 같다.

 아, 한 가지만 더. [씨네21]은 내 짧은 목록을 올리면서 실수를 두 번이나 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2007년 작이라고 했고, [무제]를 2005년 작이라고 했다. [무제]가 2005년 작이라는 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의문이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경우 허문영 평론가가 꼽았을 때는 2006년이라고 해주었다. 아무래도 나는 미움 받고 있나보다. (혹은 이런 걸로 나를 자극해서 포스팅을 하게 하려는 술책일지도?!)

 [씨네21]에 실린 다른 91인의 목록은 물론 즐겁다. [Sight and Sound]에서 10년에 한 번씩 하는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 열 편 목록도 그렇지만, 역시 이런 목록은 최종 집계 결과보다는 개개인의 선택을 들여다보는 쪽이 훨씬 좋다. 길게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고, 사실 바빠서 정독하지도 못한 채 흥미로운 목록들만 주로 읽었지만 짧게 감상을 나열하자면,

 홍성남 평론가의 [콜래트럴(Collateral, 2004)]에 대한 격찬이 반갑다. 역시 마이클 만의 최고 걸작이며, 나도 넣을까 말까 잠깐 고민했다. 박진형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는 크로넨버그의 영화 중 [동방의 약속(Eastern Promises, 2007)]을 꼽았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보이는 것이 완전히 달라져서 여전히 강력하게 무슨 의견을 제시하기가 힘든데, 그는 무엇을 보았을지 궁금하다. 김봉석 평론가는 [절규]를 꼽았다. 나는 나 외의 다른 사람이 이 영화를 꼽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다시 말하자면 내게는 나름대로 "회심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무척 놀라웠고 반가웠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는 마이클 만의 작품 중에서 하필이면 [인사이더(The Insider, 1999)]를 꼽았다. 물론 좋아하는 영화지만 역시 의외다. 그리고 아벨 페라라의 [R X마스('R Xmas, 2001)]! [절규]를 넣을까 이걸 넣을까 고민했기 때문에 또 한 번 놀랐다. 정말 멋진 크리스마스 영화라고 생각하며, 이상할 정도로 아끼고 싶은 영화다. 장병원 [FILM 2.0] 편집장의 목록에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1996)]이 있다. 깜짝이야. 그러나 그가 과거 [팜므 파탈(Femme Fatale, 2002)]에 대한 애정을 적극 피력했음을 생각하면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만 [팜므 파탈]이 아니라는 점이 의외였다. 물론 나도 [미션 임파서블]을 더 많이 보기는 했는데. 정수완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의 목록에는 마틴 스콜세지의 [Shine a Light(2007)]가 있다. 부러워 죽겠다. 그리고 얄밉다. CJ에서 수입해서 7월에 개봉한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전주에서 좀 미리 틀어주면 안 되었단 말입니까! (가만, 이번에 깜짝 상영 있나?) 김영진 평론가는 열 편에 대한 멘트 중 다섯 개를 "~가 아닐까" 식의 물음으로 끝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한창호 평론가는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Spider, 2002)]를 꼽았고 김두열 [씨네21] 블로거는 같은 감독의 [충돌(Crash, 1996)]을 꼽았다. 나는 [충돌]을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크로넨버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는 언제나 들어보고 싶다.

 장진 감독은 [킬러들의 수다(2001)]를 넣었다. 왜 다른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인지 궁금하다. 변영주 감독은 박찬욱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를 꼽았다. 멋지다. 봉준호 감독은 [폭력의 역사]를 꼽았다. 역시 뭘 좀 아신다. 정범식 감독이 [올드보이(2003)]를 꼽은 이유는 정말 웃겼다. 이해영 감독은 스파이더 맨 시리즈를 꼽았는데 흥미롭게도 [씨네21]의 표기에 따르면 3편은 포함되지 않는다. 실수인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쓴웃음이 나왔다. 팬으로서 즐겁게 볼 수는 있지만 그래도 3편은 정말 별로인 영화였다. 신재인 감독은 1위와 2위를 쿠로사와 키요시의 [큐어]와 [회로]로 꼽았다. [절규]는 아직 못 보셨나요? 한재림 감독은 [카지노(Casino, 1995)]를 꼽으면서 자신의 베스트 10에는 무조건 스콜세지 영화를 넣어줘야 한다고 말해서 반가웠다. 실은 저도 그래요. 최익환 감독은 [올모스트 페이모스]를 꼽았다. 사실 나도 [무제]랑 구분하지 않아도 큰 불만은 없다. 최동훈 감독은 [L.A. 컨피덴셜(L.A. Confidential, 1997)]을 꼽으면서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을 들려준다. "영화가 상영될 당시 책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절판. 우리나라 출판계의 현실이 일깨워준 교훈. 책은 눈앞에 있을 때 반드시 사라." 저는 헌책방에서 샀습니다. 김현석 감독은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 2002)]를 꼽으며 "천재가 쉬어가는 척하고 만든 로맨틱코미디."라고 했다. 정말 좋은 표현이다. 앤더슨 감독 이야기를 하면서 [펀치 드렁크 러브]를 지나가는 소품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간 불만이 많았다. 류승완 감독은 역시 맨 먼저 서극의 [도(刀, 1995)]를 꼽았다. 이 영화 DVD가 안 나오는 건 정말 불가사의다. [재키 브라운(Jackie Brown, 1997)]을 꼽은 것도 멋지다. 내가 [킬 빌 Vol.2(Kill Bill Vol.2, 2004)]만큼 좋아하는 영화이며 타란티노가 정말 고수는 고수라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해준 영화다. 오승욱 감독의 목록에 브라질 영화 [신의 도시(Cidade de Deus, 2002)]가 있는 것은 의외였다. 나는 "실화"임을 표방하는 그 영화의 태도가, 그리고 그 현란한 스타일이 의심스러웠다.

 리처드 페냐 뉴욕영화제 집행위원장은 DVD 음성해설도 했더니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2005)]를 꼽았다. 정말 [복수는 나의 것] 이후의 박찬욱에 대한 저평가들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켄트 존스 평론가는 최근에 본 발 루튼 다큐멘터리 때문에 알게 된 이인데 목록이 재미있다. 특히 고다르가 영국영화를 씹는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한 대목이 반가웠다. "나는 그가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영화를 한편도 보지 않았다고 장담한다"라니! 멋져요! 데릭 엘리 평론가는 용감하게 폴 버호벤의 [쇼걸(Showgirls, 1995)]을 올렸다. 그건 좋은데 마이클 만의 [히트(Heat, 1995)]를 올리면서 "마이클 만이 대화를 하찮게 생각하기 이전에 만든 작품"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나, 장이모의 [영웅(英雄, 2002)]을 꼽은 건 좀 그렇다. 고란 토발로빅 뉴욕아시안영화제 공동창립자는 열 편 모두를 (두기봉이 지휘하는) 홍콩 영화제작사 밀키웨이 이미지의 작품으로 꼽았다! 그리고 그 중 여덟 편이 두기봉의 영화다! 이 대담한 선정에 박수를!



 이상 잡담 끝. [씨네21]에 또 한 번 소개 돼버렸으니 영락 없는 영화 블로그 운영자로서 열심히 영화 관련 포스팅을 해야만 할 것 같지만 중간고사는 무서운 것이다.
by sabbath | 2008/04/19 23:52 | 영화 이야기 | 트랙백(1) | 핑백(2)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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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mithrandir.c.. at 2008/04/20 00:48

제목 : 신세기 영화 베스트 10?
SabBatH님: [씨네21] 650호 “신세기 영화 베스트 10″에 대한 첨언 씨네21 개편과 함께 “from 1995 to 2008 감독, 평론가 92인의 신세기 영화 베스트 10″라는 특집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런 기사 너무 좋아하는 저로서는 상당히 반가운 이번호. 저......more

Linked at Movies and Film .. at 2008/04/20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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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있다. 그 중 내가 오랫동안 읽고 있는 블로그에 실린 목록들을 소개한다. colin2 - 1995년부터 2008년까지 13년간의 베스트 10sabbath - 650호 "신세기 영화 베스트 10"에 대한 첨언mithrandir - 신세기 영화 베스트 10?미리내 - 1995-2008 영화 베스트   꾸준히 지켜볼 수 있는 이의 주관에 의거한 ... more

Commented by mithrandir at 2008/04/20 00:00
아아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고백하자면, 저도 들어갈 뻔했습니다.

친구들이 두고두고 놀려댔을텐데 그거 어찌 감당할 뻔했는지... -_-;;;;
Commented by mithrandir at 2008/04/20 01:00
절규 정말 좋죠. 회로만큼이나.

펀치드렁크러브는...
솔직히 말하자면, 전 데어윌비블러드보다 그 영화가 훨씬 좋았어요.
전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오아시스를 최고로 치죠.
Commented by 개구르르 at 2008/04/20 02:14
우연히 찾았네요. 오늘 시네 21 지하철에서 사서 봤어요~ㅎㅎ
그 대표 블로거 4인중 한분이시군요 .
글잘봤어요 히히 저 가 정말좋아한영화가 몇개있군요 !
Commented by hermes at 2008/04/20 03:29
저도 이번 기사 잘 읽었어요. 이번 씨네 21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 거리가 많아 좋은 것 같아요. :)
Commented by 닥슈나이더 at 2008/04/20 11:43
흠. 그런일이.... 이번 씨네 21 한 8년만에 사봐야겠군요...ㅠㅠ;;;
Commented by 어떤 날 at 2008/04/20 12:14
저도 이번 창간호 샀지요. 읽을 거리가 참 많더군요.
보는 순간 앗!!! (감탄사) 내가 눈팅 했던 그 사람 :-)
새벗님. 이미 유명인사시구나 생각했죠.^^ 여기에 올려주신 베스트10 첨언 잘 읽었어요.
베스트텐 기사를 보니 장진 감독. 멋쟁이. 류승완감독 최고 이상형. 어쩜 그리 친절하신지.
Commented at 2008/04/20 14: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4/20 22:39
mithrandir / 에이, mithrandir 님이 뭐 어때서요.

제 경우를 보면 92인 안에 들어갔고, 목록을 올렸다는 건 별로 곤란할 게 없는데 블로거로 소개된 주제에 블로그가 정체 상태라는 점이 가장 민망합니다.

저도 [펀치 드렁크 러브] 무척 좋아합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를 보게 해준 계기가 된 작품이라 특히 각별하게 다가와요. 무엇보다도 보고 나서 애인에게 키스하고 싶었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옆에 애인이 없었죠). 이번 [씨네21] 목록들을 보니 은근히 지지자들이 많기에 기뻤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로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저와 제 친구의 추천으로) 이 영화를 보았는데 남자들은 상당히 좋아하는 반면 여자들은 하나 같이 그저 그렇다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뭔가 의미 있는 반응일까요? 아니면 그냥 우연?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4/20 22:47
어떤 날 / 어제 막 보았을 떄는 제 목록이 재미 없게 나온 것에 분개하여 대충 써 보았는데, 자고 일어나서 보니 역시 목록 자체가 원래부터 따분한지라(하여튼, 뽑은 저로서는 따분해요;;) 아무리 멘트를 달았다 한들 별로 재미가 없어 보여 안타깝고 죄송합니다. 저도 류승완 감독님처럼 암만 열심히 관심을 가져도 계속해서 '어, 이 분이 이런 작품을 좋아하셨나?!'하며 놀라게 만드는 목록을 내놓을 수 있도록 분발하겠습니다 -o-)/
Commented by cain at 2008/04/20 23:19
잘 읽었습니다.^^ 사실 아니 왜 목록만 써서 보내셨단 말인가!!하고 궁금해했어요.
Commented by colin2 at 2008/04/21 00:51
포스팅 잘 읽고 갑니다. 춘향뎐 저도 정말 좋아해요 ^^
Commented at 2008/04/21 11: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4/21 11:3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한군 at 2008/04/21 17:04
비슷하게 개봉한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보다 [피를 부르리라]를 꼽는 분이 많은 듯.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4/21 18:52
비공개 / 대체 [펀치 드렁크 러브]의 어떤 속성이 그런 반응을 끌어내는 걸까요. (정말 [펀치 드렁크 러브] 좋아하시는 여성 관객은 아무도 안 계신가요?) 통 짐작이 안 됩니다. "대놓고 남자 영화"는 물론 아니고(그리고 여성 관객들은 대놓고 남자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에는 충분히 반론/반례를 제시할 수 있지요. 당장 마이클 만 좋아하시는 게 좋은 예일 테고요), 애덤 샌들러가 중심이 되는 남성 중심의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을 따분하게 다루었다는 생각도 안 들고… 잘 모르겠어요. 본지 오래된 영화니까 다시 보면 보이려나.

비공개 님께서도 마이클 만 작품 중 [인사이더]를 고르시는군요!
Commented by qwe at 2008/04/21 19:01
정범식 감독이 올드보이에 대한 멘트도 그렇지만 베스트 10에 최야성 감독의 <파파라치> 넣은 것 보고 놀랐습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4/21 19:03
한군 / 두 영화 중 어느 쪽이 더 우수한가, 하는 문제는 일단 논외로 치고요(그거야 저로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생각은 듭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와 [피를 부르리라]를 비교해 보았을 때 후자가 좀 더 고전적인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더 익숙하게, 빠르게, 깊게 받아들일 여지가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좀 더 톡 까놓고 말하자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를 베스트 목록에 올리려 하다가도 아직 그 영화를 충분히 보았다고 하기가 어려워서 망설이게 되는 경향이 있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어요. 코엔 형제의 과거 작품들과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사이에 놓인 간격이 주는 충격보다는 앤더슨의 과거 작품들과 [피를 부르리라] 사이에 놓인 간격이 주는 충격이 더 컸던 것이 아닐까. 그 간격이란 말 그대로 성취도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품 발표 간격의 문제일 수도 있고 또는 스타일 상의 변화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겠지요. "최근 13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해 보았을 때 95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여전히 좋은 필모그래피를 유지하고 있는 코엔 형제에 비해 이 13년 사이에, 그리고 특히 지난 해에 불쑥 튀어나온 느낌을 주는 앤더슨을 꼽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클 수도 있었을 거란 추측이죠. 무의식적으로 말입니다.

여담이지만, 제 입장은 전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설령 [피를 부르리라] 혹은 앤더슨의 다른 영화를 꼽지 않았더라도 그 자리를 코엔 형제로 채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스타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베스트 목록에 올리고 싶어할 정도로 추종하지는 않거든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4/21 19:03
qwe / [부기 나이츠]보다 낫다는 멘트 때문에 저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만 정작 어떤 영화인지 전혀 알지 못해요. 궁금합니다.
Commented by 유사쿠 at 2008/04/21 20:09
그럼그렇지. 어째 이상하다 했어요. 왜 지로형만 이렇게 심심한 베스트 10을 뽑았을까 했는데, 역시 그랬군요. 이번 포스팅 덕분에 베스트 10목록의 코멘트를 들을 수 있어서 매우 다행이네요. 그런데 꼼방에 [절규]가 있나요? 수요일에 가서 꼭 봐야겠어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4/21 20:19
유사쿠 / 아니, [절규]는 2007년 작품인데 우리나라에는 개봉도 안 했고 DVD도 안 나왔어. 나는 작년 초에 서울아트시네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때 봤지.
Commented at 2008/04/22 10:1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nixon at 2008/04/22 15:20
우와. 새벗님이나 미스란디르님이나 대단하십니다. 저도 사봐야겠어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4/23 22:31
nixon / 겸손이 아니라, 저는 정말로 대단하지 않아요; 블로그가 이 모양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차에 몇 년 간 잡담 좀 썼다고 "블로거"라는 호칭으로 잡지에 이름을 올린 게 오히려 민망한 노릇입니다. 지금 영화제를 준비하고 계시는(!) nixon 님이야 말로 대단하신 거죠.

근데 이번 주 [씨네21]이 정말 재밌기는 재밌더군요. 왜 이런 목록들은 보고 또 보고 하는 게 안 질리나 몰라요. 누가 뭐 꼽았는지 대충 알면서도 자꾸 보게 됩니다. (저만 그러려나요;;)
Commented by Q at 2008/04/26 07:39
새벗님과 저의 (잠정적인) 베스트 리스트가 무려 네편이나 겹치는 군요 ^ ^ 역시 별로 달갑지 않은 군사주의적 표현을 쓰자면 "으햐 역시 새벗님은 우군 (友軍) 이얏" ^ ^ 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음 새벗님의 [짝패] 선정을 보니 제 리스트에도 류승완 감독님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를 넣었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사실 한국영화 한편만 빼놓고 다 지구상에서 없어진다고 하면 저는 [복수는 나의 것] 이 아니고 이 영화 필름이 든 캔 부여잡고 웅크리고 전신방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4/27 00:26
Q / 네 편이나 겹치니까 (실제로 그런 형국인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지만) 너무 Q님 따라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괜히 좀 걱정된다고요. 하긴, 여섯 편이나 안 겹치니까.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데이빗 크로넨버그, 박찬욱, 폴 토머스 앤더슨 뭐 이런 분들께서 지나치게 잘 만드시니까 별 수 있나요 ^^;

오옷,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렇게 좋아하시나요! 리퀘스트 한 번 해볼까요^o^

…라고 말하려다 보니 줄스 다신 필름 누아르 시리즈 리뷰 때문에 찔려서 안 되겠습니다. (어이구, 빨리 끝나다오, 중간고사 ㅠㅠ)
Commented at 2008/05/01 21: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5/02 08:30
비공개 / 그것 참;;

아니 재밌다시면서 딴짓을 하시다니요;; 장철 회고전은 2004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연계해서) 한 적이 있어요. 저도 그 때 한 편도 보질 않아서(않은 거죠. 그 때만 해도 장철을 몰라서;;; 당시 부천도 갔는데 무슨 [원더풀 데이즈] 같은 거나 보고 말이죠… OTL) 아쉽습니다. 왕우의 뒤로 한시가 좌르륵 펼쳐지는 걸 스크린에서 봐야하는데.

적룡-강대위 콤비 영화들은 어찌 보실지 궁금하네요. 그 뒤로도 장철은 영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하여튼 장철 하면 왕우 주연의 초기작들과 적룡-강대위 주연의 중기작들로 나뉘는 기분이에요. 요즘 관객들에게는 적룡-강대위 쪽의 인기가 월등히 높지 않은가 싶은데 저는 오승욱 감독의 세례를 받아서 그런지 왕우 쪽을 좀 더 좋아합니다^^; [금연자]를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고요.

…여튼, 혼백을 날려보내는 결말까지 꼭 보시길! 그럼 저는 이제 전주로 갑니다아~
Commented at 2008/05/05 20:1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h at 2008/05/10 22:51
맞아요. 박찬욱의 '금자씨'와 '싸이보그'의 저평가에 대한 이의, '펀치드렁크러브'가 소품이라는 의견에 대한 이의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저와 제 친구들은 '펀치드렁크러부'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우연이십니다... :)

그나저나 Sabbath님이 극찬하시는 영화 중에 못 본 것도 너무 많아서 한숨 한 번 쉬고, 그냥 조용히 인터넷 창을 닫으렵니다. 어차피 대부분 못 볼 테지요... 에효~

+ 그나저나 창간13주년 씨네21 넘 좋았어요. 그런 목록이 대거 있는 특집 좋아해서... 장한나 인터뷰도 좋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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