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 :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
 3년여의 백수 생활을 그만 두고 복학을 하면서 영화 보기에 큰 지장이 생겼느냐 하면,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나아요. 이건 제가 그만큼 공부를 안 한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아무튼 일주일에 한 편 볼까말까 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아직 그럭저럭 섭섭하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보고 싶어서 구비해 둔 영화를 다 보지는 못하는 게 아쉽지만 그거야 학교 다니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나 분명히 큰 차이가 생겼는데, 바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수가 대폭 줄었다는 겁니다. 2월까지만 해도 게으른 몸을 일으켜 메가박스도 가고, 광주극장도 가고, 심지어 서울아트시네마도 갔는데 3월부터의 통계를 보니 형편없이 줄었네요. 3월 21일 이후로 극장에 간 적이 없다니.

 그런 와중에도 특히 막대한 손해다 싶은 영화들은 역시 서울아트시네마를 위시한 예술영화전용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제용 영화"들입니다(표현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하여튼 어떤 영화들인지는 아시죠? 수입 ․ 심의를 거쳐서 개봉하는 영화들 말고 영화제 상영 목적으로 프린트를 대여해 와서 심의 없이 상영하는 영화들 말입니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가서 영화를 보는 게 광주에서 서울로 와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힘들 줄이야. "존 휴스턴 회고전"도 거의 날려먹었고, "박창수, 루비치를 연주하다"도 한 편도 못 봤고, 결국 "에로스, 학살 : 일본 언더그라운드 영화 걸작선"도 건너뛰었지요. 마지막의 것은 전주국제영화제와 바꿨다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전에도 상영했던 것을 못 본 거니까.

 그렇습니다만, 정말이지 기필코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제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전주국제영화제… 가 아니고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입니다. 아시는 분들께서는 아시고 모르시는 분들께서는 모르시겠지만 한국영상자료원은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자리하고 있다가 상암동에 새로운 청사를 지어서 작년 여름 무렵에 이전했지요. 그리하여 작년 6월에 "DVDs on Screen-미개봉작을 스크린으로"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시네마테크로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서초동 시절과 마찬가지로 영화 자료실로서의 업무도 해왔습니다만 실질적인 "개관"은 바로 5월 8일부터 시작될 이 개관영화제를 통해 선포된다고 해요(영상자료원 홈페이지 연혁에는 5월 11일 개관이라고 돼 있더군요).

 한국영상자료원의 역사에 대해서 읊자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 그리하여 5월 8일부터 25일까지 18일에 걸쳐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개관영화제가 열리는데, 여러모로 구미를 당기는 작품들이 상영됩니다. 영상자료원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한국영화를 상영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는데 최종 목록을 보니까 상영작의 폭이 예상 외로 다양해요. 최근에 발굴된 고전 한국영화들을 상영하기도 하고, 그간 영상자료원에서 수집했거나 외국 아카이브에서 초청해 온 아시아 고전 영화들도 있고, 식민지시기에 제작된 기록 ․ 선전영화도 있고, 7~80년대 극장 관객들을 대놓고 노리는 소위 "명작"들을 모아놓기도 했고, 상영 시작 전에 단단히 각오를 하고 봐야할 만큼 긴 영화들만 모아놓은 섹션도 있습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상영작이 상당히 많으니까 옮기기는 그렇군요. 개관영화제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길.


 (개막작이자 화제작인 [청춘의 십자로(1934)]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기는 했는데 이 글을 쓰는 사이에 9일, 10일 상영이 현장 판매분까지 모두 매진되고 말았습니다. 으윽. 그래도 제가 써둔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뭐 이번 한 번만 상영하고 말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김태용 감독이 연출하는 "쇼"를 다시 볼 기회는 없을 듯하지만. 저는 미리 예매를 해뒀읍죠)


 고전 한국영화 좀 보신다/보겠다 하시는 분들께서는 아무래도 개막작인 [청춘의 십자로]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겠지요. 이전까지는 2006년에 발굴된 [미몽-죽음의 자장가(1936)]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였습니다만 이제는 [청춘의 십자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현존 최고(最古) 한국영화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관심은 연구자 여러분께 맡겨야 할 것 같아요. 또는 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도… 물론 흥미는 있습니다만 그것만이라면 지금처럼 흥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청춘의 십자로]에는 또 다른 의의, 제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특성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한국에(조선에, 라고 해야 할까요) 유성영화가 도입되기 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저항 불능이네요. 비록 제 경험은 거의 미국영화에 국한되어 있습니다마는 하여튼 무성영화를 한 편씩 볼 때마다 이 사실상 유성영화와는 아예 다른 장르라고 간주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영역에 대한 애정이 쑥쑥 커져 가는 터인지라 대체 우리나라에서 만든 무성영화라는 것은 어떠한 꼴이었을지 눈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을 견디기 힘듭니다. 물론 식민지 시기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하니 외국 영화계에서 유성영화 직전에 만들어냈던 눈부신 걸작들과 비교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추측을 해보지만 하여튼 그런 판단이야 보고 할 일이고, 일단은 보고 싶습니다. 당장 자막이 어떻게 생겼을지 부터가 궁금해요.

 더 주목할 만한 점은 이 한국 최고 무성영화의 공개에 맞추어 영상자료원 측에서 흥미로운 기획을 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면 영화만 보지 않았지요. 아마 7~80년대를 다룬 한국영화에서 고등학생 주인공들이 선생님 몰래 극장가서 영화 보는 장면에서 나오곤 하는 [대한뉴스]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텐데요, 이러한 영화 상영 방식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건 아니죠. 워너브라더스에서 내놓는 30년대 고전 영화 DVD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한 편의 본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서 뉴스도 보여주고, 단편 영화 또는 애니메이션도 보여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초기 한국영화계, 특히 무성영화 시기에는 특히 이러한 "공연"으로서의 영화 상영이 대단히 다양한 방식과 규모로 전개되어서, 영화 앞뒤에 배우나 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상영 중간에(?!) 창을 한달지 마술을 보여준달지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해요. (아마 외국에서도 초기 영화사에서는 마찬가지였겠지요. 하지만 과연 D.W. 그리피스의 두 시간 넘는 장편 영화가 그런 식으로 상영됐을지는… 추측컨대 단편 영화만이 존재하던 정말 초기에만 성행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러한 쇼와 영화 상영의 분화가 좀 더 늦게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테고요) 그런가 하면, 이것은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특히 무성영화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이야기의 전달을 스크린 속 화면에만 의존하지 않고 변사의 목소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지요. 그래서 당대에는 배우보다 변사가 더 인기가 많아서 "스타 변사"는 이 극장 저 극장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영상자료원의 흥미로운 기획이란, 바로 [청춘의 십자로] 상영 때 영화만을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쇼"로서의 영화 감상, 그리고 변사의 해설과 함께하는 무성영화 감상을 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쇼"에 어떠한 공연이 포함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영상자료원에서 공개한 제작진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연 어떠한 모양새가 될지 흥미진진합니다. 영화의 복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 감상 경험의 복원이라는, 진귀한 체험이 되지 않을지요.


 개막작 이야기를 했으니 폐막작 이야기도 잠깐 할까요. 폐막작은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입니다. 이 작품 역시 [청춘의 십자로]와 마찬가지로 최근에 발굴되어 이번 개관영화제에서 최초로 상영되는 작품입니다. 저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별로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인상이 남아있어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올해 초였는지 작년이었는지 집에서 슬렁슬렁 TV를 돌리다가 [홍길동]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보지도 못했고 끝까지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그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이 작품의 몇몇 장면들을 보았는데, 맨 땅에 헤딩하듯 만든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라면서 그 완성도가 생각 이상으로 훌륭해 보여서 놀랐지요. 그리고 그런 애니메이션의 전체 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고요.

 음, 글을 쓰다 말고 잠시 검색해 보니까 제가 본 다큐멘터리는 [잃어버린 기억-만화영화 홍길동]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홍길동 탄생기념사업회라는 단체에서 제작한 것이고 2007년 2월 17일에 KBS1에서 방영했네요. 관련 기사에 따르면 2006년 국내에서 [홍길동]의 예고편과 편집 안 된 원판 일부가 발견되었고, 다큐멘터리는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올해 초에, 일본에서 [홍길동]의 16mm 버전 컬러 필름이 발견되었다고 해요. 영상자료원에서는 그 필름을 35mm로 확대한 후 기존에 소장하고 있던 사운드와 합쳐서 복원했다고 합니다. 뭐랄까, 믿기 힘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청춘의 십자로] 같은 경우는 원래 그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모르다가 발굴했다기에 "와, 그래요?"한 거지만 [홍길동]은 대부분이 유실된 채 남은 부분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차에 전체를 볼 수 있게 된 셈인지라 심적인 감흥은 더 크네요.

 이하는 [홍길동]의 장면 일부를 담은 캠판(…) 동영상입니다.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회화에 가까운 느낌의 그림체도 상당히 인상적이고 해학적인 표현들도 재밌는데, 특히 1분쯤 넘어서 나오는 어떤 장면은 입을 다물 수 없는 아스트랄의 극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용가리가 달밤에 서울 시내를 헤집고 다니다가 갑자기 록큰롤 버전 아리랑에 맞춰 막춤을 춘다는 김기덕 감독의 [대괴수 용가리(1967)]와도 겨뤄볼 만한 수준인 듯.



 복원전 섹션에서는 다섯 편의 작품이 상영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습니까마는 그 중에서도 찰스 버넷 감독의 [양 도살자(Killer of Sheep, 1977)]이 각별히 홍보되는 듯합니다. 작년 말 이런저런 평론가들의 Best 10 목록에서 이 작품의 이름을 보고는 대체 뭘까 궁금했는데, 70년대에 나온 흑인영화라는군요. 필름이 훼손되어 30여 년 동안 사라졌다가 작년에 마침내 복원판이 공개되어 큰 반향을 얻은 작품입니다. 미국에서 깔끔한 DVD가 나왔으나 안타깝게도(혹은 가정경제를 생각하면 다행스럽게도) 영어 자막조차 지원해주질 않아서 볼 수가 없었지요. [씨네21] ibuti 님의 DVD 리뷰를 참조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하지만 저는 그보다는 다섯 편 중 가장 언급이 없는 조셉 로지 감독의 [에바(Eva, 1962)]를 보고 싶네요. 예전에 "알랭 들롱 회고전-신화로의 귀환" 할 때 조셉 로지 감독의 작품 중 [클라인 씨(Mr. Klein, 1976)]를 본 적이 있습니다. 멋있고 잘 생긴 알랭 들롱의 폼 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저의 기대를 깡끄리 밟아 뭉갠 영화였는데, 암만 무슨 험한 일이 일어나도 별로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침울하게 상황을 묘사하면서 주인공과 관객을 옥죄는 태도가 인상적이었죠. 초반에 감을 못 잡아서 언젠가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중 하나에요. 뭐 아무튼, 그래서 감독 때문에 [에바] 쪽에 마음이 끌립니다. 줄거리도 재밌고, 잔느 모로가 팜므 파탈로 나온다니 더더욱.


 수집전 섹션은 그 안에서 또 세 개로 분류가 돼 있는 모양입니다. 영상자료원 외 각국 시네마테크에서 수집한 동아시아의 고전 영화들이 있고, 식민지 시기의 기록 ․ 선전영화 모음이 있고, 특히 전시(戰時)에 일본 본토와 조선에서 상영된 뉴스릴 모음이 있군요. 아무래도 저는 극영화들 쪽에 관심이 갑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과 독일이 합작하여 만든 무성영화 [무사도(武士道, 1925)]가 끌려요. 내용은 영상자료원의 소개대로라면 일본에 표류해 온 서양인이 사무라이들의 무사도에 감화되어 그들과 함께 싸운다는, 정말이지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최후의 사무라이(The Last Samurai, 2003)]스러운 이야기인 모양입니다. 그런 데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고, 일단은 무성영화라니까, 그리고 막 영화 산업에 뛰어든 일본과 이미 표현주의 사조를 일으키며 한바탕 으샤으샤 하던 독일의 합작이라니까 보고 싶습니다. 이 섹션에서 하나 더 고르자면 우리나라 출품작인 [병정님(兵隊さん, 1944)]. 조선인 청년이 황군의 병사로서 기꺼이 복무하는 "대놓고 친일영화"죠. 이병일 감독의 [반도의 봄(1941)]처럼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영화도 물론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만 의외로 이처럼 노골적인 친일영화들이 영화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보는 이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경우가 있어요. 한국영상자료원 VOD 서비스를 통해서 본 이마이 타다시 감독의 [망루의 결사대(望樓の決死隊, 1943)] 같은 작품이 그런 예였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망설임 없이 만든 친일영화인데 경이로울 정도로 영화적 짜임새가 훌륭해서 "한국인" "영화팬"으로서 혼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작품. [병정님]이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추억전에 관해서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정식 개봉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고전영화"들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어느 것을 보아도 좋겠지만 특별히 데이빗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65)] 쪽에 관심이 가는 것은 물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원작을 워낙에 좋아하기 때문은 아니고(읽어본 적도 없어요), 데이빗 린 감독이 후기에 만든 시네마스코프 사이즈 대서사극을 극장에서 필름으로 볼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겠지요. 시네마스코프 대형 서사극을 만든 사람이 린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어째선지 그의 영화들은 DVD를 구해도 TV나 상영실 스크린으로 보기 꺼려져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1962)]의 명성 때문인가. 하나 더 꼽자면 저는 역시 알랭 들롱 팬이기 때문에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1960)]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무라이(Le Samouraï, 1967)]만큼은 아닐지라도 들롱의 미모가 찬란히 빛을 발하는 작품 중 하나지요. 뭐, 이런 식으로 소개 비슷한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울 정도로 유명하니까…….


들롱 님 미모는 이 정도
이게 캡처가 아니라 동영상이 되면 호흡이 힘들어집니다




제가 아주 아주 사적인 이유 때문에 "싫어하는" 이 영화도 상영됩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 오프닝은 극장에서 필름으로 보면 정말 죽입니다


 특별전도 세 개로 나뉘어 있는데, 長-편영화는 이름처럼 상영시간이 무지막지하게 긴 영화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극단적으로 긴 영화들은 아닙니다만. 일단, 이제는 좀 지겨워지는 감도 있지만,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 다시 한 번 추천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너댓 번 했고,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상영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웬만큼 보시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요(정말 이 영화는 판권을 찾지 못해 DVD를 출시하지 못하는 설움을 극장 상영으로 톡톡히 달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못 보신 분들은 제발 좀 보시라. 에이, 몰라요. "옛날 한국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와장창 박살낼 수 있는 괴력의 영화라는 이야기조차 이제는 지겹습니다. 그냥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썼던 글을 링크하는 것으로 대신하죠. 그런데 지금 보니 심지어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썼던 글"이라는 것조차도 링크로 이루어졌네요… 아아, 정말 저는 지난 2년 동안 [최후의 증인]을 열심히 추천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최후의 증인] DVD 출시 추진 위원회"의 노력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을는지?)

 한국영상자료원 : [최후의 증인]

 長-편영화 섹션에서 제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아마 학업의 몰상식한 방해만 없다면 기필코 보게 될 영화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1900(Novecento, 1976)]입니다. 재작년엔가 미국에서 감독판 DVD가 출시되기는 했지만 저는 아직 못 사고 있었는데 극장에서 보게 되겠어요. 베르톨루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베르톨루치의 영화 세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회의와 반성, 의심의 눈을 거두기 힘들겠지요. 저는 그의 [순응자(Il Conformista, 1970)]를 무척 좋아하지만 그 영화 역시 볼 때마다 먹물스러운 변명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돼요. 그러나 사실 그런 게 매력이기도 합니다. 그가 5시간 15분에 걸쳐서 이탈리아 현대사를 훑으면서 파시즘과 계급에 관한 기나긴 드라마를 펼쳐 제 정신을 현혹시키려고 시도한다면, 기꺼이 맞붙어주고 싶습니다. 얄팍해질 위험은 있을지언정 거짓말 하는 감독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더군다나 그 드라마에 젊은 시절의 로버트 드 니로와 늙은 시절의 버트 랭카스터가 함께 나오며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맡았다면 저항불능입니다.

드 니로 선생께도 이런 시절이 있었죠

 특별전 중에는 영화, 박물관이라는 섹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에 관한 영화를 모아놓은 것인데, 세 작품이 상영돼요. 우리나라 극장에서도 정식 개봉한 바 있는 [자정이 지난 뒤/애프터 미드나잇(Dopo Mezzanotte, 2004)]은 이탈리아의 모로 영화박물관 야간 경비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는데 개봉 당시에도 제법 반응이 좋았지요. 무엇보다도 버스터 키튼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하니 호기심을 감추기 힘듭니다. 삶에 대한 어떤 성찰에까지 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적어도 영화광으로서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애정은 가득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저는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Dreamers, 2003)]을 볼 때도 전체적으로는 그리 깊은 감명을 받지 못했습니다만 온갖 고전들을 인용하며 되새기는 젊은 영화광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반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행복해 했거든요. 일단은 [자정이 지난 뒤]도 그런 맥락에서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김영진 평론가도 [FILM 2.0]의 칼럼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군요. "이탈리아영화인데 영어제목을 달고 한국에 개봉한 이 영화는 별다른 줄거리가 없고 세 남녀의 삼각관계가 나오지만 그것보다는 줄거리를 핑계로 옛날 무성영화 필름 클립을 보는 재미, 혹은 영화가 순진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그때의 기분을 만끽하려는 영화에 가깝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제작한 [나의 사랑, 나의 영화(2008)]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상영작 정보란에는 상영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상영시간표를 확인해 보니 50분 분량의 짧은 다큐멘터리이네요. 2008년 작이라고 된 것도 그렇고, 아마 이번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한국 영화감독 15인이 각자 3분 정도의 시간을 갖고 자신이 존경하는 다른 한국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 열다섯 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수용, 임권택, 이장호, 이두용, 배창호, 홍상수, 이창동, 김동원, 변영주, 원신연, 김태용, 이성강, 오승욱, 정재은 정지우. 사실 한 사람 당 3분 가량이라면 너무 적지 않은가 싶어서 큰 흥미가 없었는데 [씨네21]의 소개글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홍상수 감독이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에 대한 감회를 밝힌다더군요. 예상치 못한 조합인지라 그 내용을 꼭 듣고 싶습니다. 또 저는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간한 Film Story 총서 시리즈 중 김영진 평론가가 쓴 [이장호 vs 배창호]를 읽은 뒤에 배창호 감독의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는데 배창호 감독이 직접 출연도 하고, 또 변영주 감독이 배창호 감독의 작품에 대한 애정도 표한다 하니 그것도 궁금하네요.

 끝으로, 드디어, 제가 이 블로그를 통해 정말 줄기차게 인용해 왔던,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 하는 사적인 미국 영화 여행(A Personal Journey with Martin Scorsese Through American Movies, 1995)]이 상영됩니다. 에헴. 이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씨네21]이 공인한 "당신이 믿을 만한 친구로 생각하는 그"이자 "영화에 관한 글로 널리 알려진 블로거"인 제가 1995년부터 2008년 사이에 나온 뛰어난 영화 열 편 중 한 편으로 꼽는 작품 되겠습니다(저는 이로써 점잖은 인생을 포기하고 말았어요).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 [자정이 지난 뒤]랑 [나의 사랑, 나의 영화]에 관해서는 길게 소개를 해줬으면서 이 작품에 대해서는 고작 세 줄만 언급하고 있어서 무척 심통이 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조금 더 소개를 하겠어요.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 하는 사적인 미국 영화 여행]은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영국영화협회, BFI에서 기획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중 미국편으로 제작되었습니다(다른 나라 것도 있나요? 예, 있습니다). 스콜세지 자신이 직접 사회자로 나와서 자신의 어린 시절 영화 체험에서 출발하여 미국 영화를 천천히 짚어 나갑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소개글에서는 "웨스턴, 갱스터물, 느와르 등 장르적으로 구분되어 흥미를 더한다."라고만 말하고 있으나 사실 그건 전체의 1/5에 불과합니다. 스콜세지는 이 229분짜리 다큐멘터리를 크게 다섯 개의 분야로 나누어두었습니다. 이 다섯 부분은 각각 "감독의 딜레마", "이야기꾼으로서의 감독", "환영술사로서의 감독", "밀수업자로서의 감독", "우상파괴주의자로서의 감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요. 그는 흑백 무성영화에서부터 칼라 시네마스코프 영화까지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근차근 제시하는 대신 자신이 마련해둔 사적인 주제에 맞추어 종횡무진 넘나듭니다. 그것은 미국영화란 특히 무엇보다도 산업이자 예술인 영화의 본능적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영역이기 때문일 거예요. 작가 자신의 창조성과, 상업으로서의 영화가 요구하는 틀 사이에서 고뇌하는 감독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장르라는 산업적 틀이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지, 감독이 영화매체라는 기계장치를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비전을 표현하려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산업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저변에 결코 타협하지 않는 개성을 숨겨두었던 감독들과,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대놓고 투쟁을 벌인 감독들을 보여주지요. 그러니까 이것을 단지 한 영화광이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애정을 바친 것이다, 라고만 한정지어 받아들이는 건 좀 아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바로 그 애정을 제시하는 방식은 결국 미국 감독으로서 마틴 스콜세지 자신이 느끼는 미국 영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이러한, 그냥 듣기에는 뭔가 거창하고 힘겨울 듯한 이야기를 말보다는 수많은 영화를 통해 직접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이 다큐멘터리는 그 기나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볼 수 있게 만드는 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DJUNA의 말처럼, 일단 그토록 다양한 영화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경험입니다. 스콜세지는 온갖 영화들의 중요 장면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오히려 그걸 보고 나면 거기 소개된 영화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됩니다. TV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과는 차원이 다름을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보고 여기서 뭘 어쩌라는 거야'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229분 동안 성심성의껏 지도해주십니다

 3D로 보는 세계영화사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뮌헨영화박물관 관장 슈테판 드뢰슬러라는 이가 직접 와서 영화사 초기부터 진행되어온 3D영화의 역사에 관한 강연을 하는 프로그램인 듯해요. 소개글 중에 특히 흥미로운 건 "멜리에스와 뤼미에르의 3D영화 클립들"이라는 말입니다. 헉. 3D영화가 그때부터 이미 시도되었다는 건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3D영화에 별 관심이 없어요. IMAX도 안 가니까……. (이 정도 말하면 "생략"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한국영화, 진주를 캐다라는 섹션은 관계자 n모 님의 전언에 따르면 "'한국고전영화에는 오발탄과 하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프로그래머의 절규가 묻어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영화제 홈페이지 소개글의 첫 문장도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영화의 대표작을 말할 때 〈오발탄〉이나 〈하녀〉 같은 쟁쟁한 작품만을 떠올리기 일쑤지만 우리가 잊고 외면한 작품들 중에 의외의 걸작이 숨겨져 있다." 으음. 어쩐지 가슴이 아프네요. 그 심정 알 것 같아요. 뭐, 저 역시 [오발탄(1961)]과 [하녀(1960)]는 보았으되 이 영화들을 보지 못한 관객 중 하나이니 뭐라 하겠습니까마는. 상영작 다섯 편 모두 소개글이 흥미진진합니다. 다섯 편 모두 6~70년대 영화. 일단 저는 이 시기 영화라고 하면 무조건적인 믿음을 줘버리는 경향이 있죠. 특히 KMDB를 검색해 본 결과 다섯 편 모두 시네마스코프 영화던데요, 6~70년대 영화들은 시네마스코프라는 프레임 사이즈가 제공할 수 있는 미학의 극점을 보여주곤 하고, 꼭 극점이 아니더라도 대게 기본은 하기 마련이니 기대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동굴 속의 애욕(1964)]과 [불나비(1965)]에 가장 흥미가 동하네요.


 영화제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상암동으로 이전한 뒤 한국영상자료원의 약점이라면 역시 접근성의 문제죠. 따지고 보면 상암동 근처에 거주하시는 분들께는 서초동보다야 훨씬 가까워진 것이니까 이 "접근성"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입니다만. 그냥 제 기준으로 말하자면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가는 것보다는 더 힘들어진 게 사실이에요. 지하철도 더 오래 타야하고, 지하철역에서 나와서도 그렇게 가깝지 않고요. 그러니 가시기 전에 충분히 약도를 익혀두시길.

 개관영화제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약도

 위 링크에 따르면 영화제 기간 동안에는 지하철 6호선 수색역 2번 출구에서 영상자료원을 오가는 셔틀버스도 운행한다고 하니 참조하시길.

by sabbath | 2008/05/09 16:48 | 친구 영화관들 | 트랙백 | 핑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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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를 통해 [청춘의 십자로]를 보았다. 안종화 감독의 1934년 작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이며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한국 무성영화(게다가 사운드 ... more

Commented at 2008/05/09 21: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5/09 21: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5/09 22:36
비공개 / 현장 구매도 가능하고, 제가 링크해 둔 영화제 홈페이지로 들어가시면 인터넷 예매도 가능합니다. 인터넷 예매는 티켓링크로 연결되더군요.
Commented at 2008/05/10 00:3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5/10 10:32
비공개 / 그걸 훔치셨더라면 트뤼포가 되셨을 겁니다^^

저는 영화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극장 가기는 정말 힘드네요. 극장에서 [스피드 레이서]를 볼 것인가, 학교 감상실 스크린으로 [순류역류]를 볼 것인가, 하면 후자로 간단 말이에요. 그래도 이번 달에는 존스 박사님께서 돌아오시니 머지 않아 가게 되겠습니다만.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05/10 10:56
오오 홍길동 오오
꼭 보러 가야겠군요 =)
Commented at 2008/05/10 13: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nixon at 2008/05/12 22:53
우왓. 감사.
Commented by nixon at 2008/05/13 09:12
그리고 <최후의 증인>은 올해 안에 DVD 출시될 예정입니다. :-)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5/13 12:53
nixon / !!! 굉장한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거 지금 밝히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DVD 나오니까 괜찮아, 하면서 개관영화제 손님 줄면 어쩌시려고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5/13 12:54
조금 전 보니 [최후의 증인] 관련글에 연결해 두었던 링크가 다 깨져 있더군요. 다시 모두 복원해두었습니다.
Commented at 2008/05/13 13:1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8/05/13 13:21
비공개 / 엇, 고맙습니다. 제가 단 공개 덧글은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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