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와 레오폴드(Kate & Leopold, 2001)]
 정말이지, 수업 때문이 아니었더라면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겁니다. 전 로맨틱 코미디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특별한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제게 로맨틱 코미디는 TV 채널을 돌리다가 방영하고 있으면 잠시 멈춰서 보는 정도의 장르입니다. 애써 극장에 가서 찾아본다거나 비디오를 빌려본다거나 하진 않지요. 딱히 이유를 들어야 한다면 아마도 그건 이 장르가 가진, 구태의연함을 통해 제공되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편안한 감정 때문일 것 같습니다. 워낙에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영화 속에서 알콩달콩 사랑을 쌓아가는 남녀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다른 장르에서와 달리 이 로맨틱 코미디에서만큼은 그런 행복한 기분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기분이 지독하게 인위적으로 제조된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찌푸려집니다. 물론 정말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는 또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본 것들은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케이트와 레오폴드]는 그만큼도 안되더군요. 이 영화의 각본은 정말 무책임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갈등 요소들을 집어넣은 다음에 그 중 하나도 제대로 해결해 놓지 않고 두 주인공의 해피 엔딩으로 이야기를 끝내 버립니다. 노골적인 "사랑이면 뭐든 다 해결된다." 의식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보다도 못한 거죠. "사랑 외에 다른 건 무시하자."인 셈이니 말입니다. 하긴, 그나마 그 사랑조차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십분 쯤 지속될만한 해피 엔딩이랄까.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레오폴드 공작은 19세기에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인물로, 집안에서는 그가 부잣집 아가씨와 결혼하길 바라고 있지만 정작 그는 발명가적 기질에 충실할 뿐, 여자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신사로서의 예절에는 정통하지만요. 아무튼 어느 날, 맨하탄에 브룩클린 다리가 놓여지던 바로 그 날, 그는 수상쩍은 사내를 발견하고 그를 쫓아가게 됩니다. 두 사람은 실랑이를 벌이다가 브룩클린 다리에서 떨어지는데, 깨어나 보니 21세기의 맨하탄에 와 있는 겁니다. 자신이 쫓고 있던 사람은 스튜어드라는 얼치기 과학자로, 시간의 틈을 발견해서 시간 탐험 중이었고요. 스튜어드는 레오폴드를 간신히 진정시켜 다시 시간의 틈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19세기로 보내주겠노라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스튜어드는 레오폴드에게 21세기에 대해 제대로 안내해주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사고로 그만 병원 신세가 됩니다. 이제 레오폴드에게 남은 건 스튜어드 집의 아래층에 살고 있는 그의 전 애인 케이트와 그녀의 남동생 찰리뿐입니다.

 이 정도면 대략 짐작이 갑니다. 케이트는 다른 맥 라이언의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21세기에 익숙치 않아 어리벙벙하게 행동하는 레오폴드를 무시하겠죠. 그나마 레오폴드는 자신을 찬 전 애인 스튜어드의 친구니까요. 그렇지만 점점 19세기 신사로서의 우아한 예절을 보여주는 레오폴드에게 반할테고. 해피 엔딩이 되려면 둘 중 하나가 상대방의 시대로 가야겠고. 그리고 엔딩.

 시나리오 작가가 생각하기에도 이 스토리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였는지, 그는 그럴듯한 갈등 요소 몇 개를 끼워 넣었습니다. 일단 레오폴드가 21세기에 적응하는 문제가 있고, 영화 초반에 케이트와 스튜어드 사이에는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으며, 찰리는 연극배우로서 누나의 수입에 의존하는 반백수 생활을 하는 것에 약간의 열등 의식을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병원에 입원한 스튜어드는 일부러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진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퇴원 수속을 밟지 못하는데, 코미디로 치부하기엔 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가 떠올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여자 앞에서 입만 나불거리는 찰리의 연애 문제가 있고, 케이트에게 성적 관심을 보이는 그녀의 상사 J.J.의 문제도 있습니다. 케이트가 다니는 회사의 광고 모델이 된 레오폴드가 21세기에 대해 느끼는 환멸도 있군요. 이제 이 영화 시나리오가 가진 한계가 뭔지 쉽게 발견할 수 있겠죠. 이 모든 문제와 더불어 케이트와 레오폴드의 사랑 이야기를 두 시간 안에 어느 정도 해결을 봐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영화는 그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레오폴드는 정말이지 금세 21세기에 적응합니다. 19세기 귀족치고는 발명가로서 '깨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이건 지나치게 빠르죠. 스튜어드가 초반에 병원으로 실려 가는 바람에 케이트의 스튜어드에 대한 감정은 나올 기회가 없습니다. 나중에 두 사람이 잠깐 만나기는 하지만 두 번의 만남 모두 두 사람의 화제는 레오폴드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정작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찰리가 가지는 열등 의식은 케이트가 레오폴드를 광고 모델로 내세우면서 레오폴드에 대한 미움으로 전이되는데, 그나마 레오폴드가 찰리에게 여자를 사귀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사라집니다. 스튜어드의 병원 생활은 실소밖에 안 나오고요. 찰리의 연애 감정은 레오폴드의 진가를 확인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서, 나중에 "데이트 어땠어?" "좋았어요."라는 두 마디 대화로 마무리되고 맙니다. J.J.는? 꼴 보기 싫을 정도로 케이트에게 치근덕거리더니 레오폴드가 면전에서 창피를 준 뒤로는 갑자기 인덕 있는 상사 마냥 케이트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고 그녀를 승진시켜 줍니다. 레오폴드가 맛도 없는 버터를 맛있는 버터인 것처럼 광고하면서 느끼는 21세기에 대한 환멸은 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문제들에 집착하는 사이 영화의 중심이 돼야 할 케이트와 레오폴드의 사랑조차도 흐지부지 해지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골 때리는 건, 대체 왜 케이트와 레오폴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됐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굳이 감정이 전환되는 부분을 찾자면 아마 센트럴 파크의 백마 탄 왕자 장면(註1)이라고 해야 할텐데, 이 도를 넘어선 팬터지 때문에 영화는 멍청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긴, 그래도 케이트가 레오폴드를 사랑하는 건 그나마 이해가 된다고 합시다. 레오폴드의 19세기적 매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비록 백마 탄 왕자 장면처럼 우스꽝스럽다고 해도) 몇 번 등장하니까요. 하지만 대체 레오폴드는 왜? 자기 시대에서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명에 관심을 가졌던 인간이 온갖 신기한 것들이 널려있는 21세기에 와서야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건 무슨 까닭인가요? (제발 "맥 라이언은 예쁘고 귀엽잖아요." 같은 답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180도 반전. 지금까지 제가 늘어놓은 불평들은 과연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 쓸모 있는 불평입니까? 글쎄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맥 라이언과 휴 잭맨은 모두 멋있게 나오고 있고, (특히나 맥 라이언은 이미 이런 영화에 나오는 일에는 도가 텄죠) 각 에피소드들은 제법 재미있습니다. 대사도 종종 재치 있는 모습을 보이고요. 감정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캐릭터들은 자신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필요한 수준의 연기를 해줍니다. 덕분에 118분 동안 지루하게, 혹은 시니컬하게 바라볼 필요도 없고요. 제가 지금 늘어놓는 불평들은 모두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이야기를 재구성하면서 느낀 것들입니다. 즉, 118분 동안 별 거부감 없이 슬렁슬렁 영화를 봤다면 그게 뭐 다른 로맨틱 코미디들과 얼마나 다르냐 하는 겁니다. (하기사 그 '사랑'의 여운이 1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케이트와 레오폴드]는 이야기가 워낙 제대로 모아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어서 그렇지 기본적인 만족감 정도는 선사해 주고 있고, 그 정도면 다들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이 영화가 그 이상을 노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 정도로 씹은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흐지부지하게 글을 끝내버리기로 하죠.



 

 1. 케이트가 핸드백을 소매치기 당하자 레오폴드가 관광객용 마차에서 백마의 고삐를 풀어 케이트를 태운 뒤 센트럴 파크를 질주해서 소매치기를 붙잡습니다. 멋진 음악과 함께 백마가 등장하고,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비둘기들이 날아오르는 걸 보고 있으면 웃다가 미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덧. SF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은 과연 스튜어드의 타임 머신 패러독스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 번 스윽 하고 지나가는데 말입니다. 하기사 별로 골치아플 것도 없는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로맨틱 코미디에서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쏟아지니 어안이 벙벙해 하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 킥킥거렸습니다.

by sabbath | 2004/03/28 20:07 | 영화 감상문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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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다인 at 2004/03/29 04:27
글 잘 읽었습니다. 휴 잭맨이 아니었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링크 신고합니다. (두둥)
Commented by 염맨 at 2004/03/29 07:20
그리고 당연히, 이 영화는 그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레오폴드는 정말이지 '금새' 21세기에 적응합니다.

금새-> 금세
Commented by sabbath at 2004/03/29 07:29
다인 / 안녕하세요. 흠… 휴 잭맨은 제법 어울려서, 그가 아닌 다른 배우는 딱히 떠오르지 않더군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4/03/29 07:29
염맨 / Thanx.
Commented by 191970 at 2004/03/29 10:37
제가 가장 괜찮게 봤던 로맨틱코메디는 어느 멋진날과 내남자친구의 결혼식 두편이었습니다. 혹시 안보셨다면 한번 봐보세요.
그리고 저도 링크신고합니다. ^^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4/03/29 18:11
tv시리즈로 만들어서 여유를 가지고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편이 좋았을지도 (그러다 중간에 캔슬되면 고향으로 가는 길은 땡! 이지만;;;)
Commented by chrimhilt at 2004/03/29 23:14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많은 요소들을 엔딩에서 어떻게 정리할까 걱정했습니다. 특히, sabbath님도 지적하신 '레오폴드의 21세기 환멸'이 제일 문제였어요. 그래서 맥 라이언이 19 세기로 갔나봐요. 레오폴드 경은 병든 21세기에서 살기 싫을 테니까.
Commented by 마르스 at 2004/03/30 00:16
흠..휴 잭맨 때문에 전혀 영화의 단점이 보이지 않았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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