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3학년을 마무리하던 무렵의 일입니다. 아마 수능이 끝난 후가 아니었나 싶군요. 우연히 어느 번역가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번역물과 원문을 대조하여 교정보는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지요. 광고 메일처럼 난데없이 날아온 건 아니고, 무척 피상적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우연찮게 모 통신 동호회 게시판에서 만나 뵌 인연이 있던―혹은 여하튼 지금처럼 그 때도 말이 많았던 저를 알고 계시던―분이었습니다.
돈과는 별개로 하면 참 좋은 경험이었겠다 싶었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도 저는 저 자신의 영어 실력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서울에 계시는 그 분은 원고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직접 만나서 일하는 걸 선호하셨는데 저는 당장 어느 대학에 가게 될지 결정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대학에 가더라도 제가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기회를 주신 건 감사하지만 할 수 없겠노라고 답변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메일이 몇 차례 오고 가는 과정에서 어쩐지… 음,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겁니다. 참 이상했지요. 그 분은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셨고, 기분 나쁠 이야기도 아니었고, 제가 거절했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도 않으셨으니까요. 그래서 이거 참 이상하다… 수능도 끝났는데 아직도 내가 신경질적으로 살고 있는 걸까 하면서 몇 번이고 받은 메일을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깨달았지요. 제가 보낸 거절의 답변에 대해서 그 분이 보내신 답장에는 "하긴, 그렇겠군요.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라는 문장이 들어있었습니다. 바로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가 신경이 쓰였던 거지요. 그 전에는 일상생활에서 한 번도 그런 식의 문장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존대를 하는 중에 주어를 "나"로 쓰는 문장 말입니다. 너무 생경했지요. 그 후로도 그런 표현을 만날 일은 없었고요. 그런데 최근 일 년 간 이글루스나 DVD Prime에서 종종 그런 표현을 봅니다. 이런 식의 덧글 말이죠. : "이런, 내 무식이 탄로 났군요.",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나는 그런 경우에도 별로 당황스럽지 않더군요." 저는 이런 표현들을 볼 때마다 여전히 가슴 한 구석이 불편해집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드라마에서 곧잘 나오는, 콧대 높은 청년 재벌의 중년 비서가 된 기분이랄까? 제가 이런 표현을 쓰는 건 아주 가까운,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대할 때뿐입니다. 이를테면 애인님은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 대화할 때 존대를 하되 스스로에 대한 호칭은 '나'를 쓰게 되죠. 대화할 때 '저'를 넣어버리면 거리가 너무 먼 느낌이 드니까요. 문어체―즉 편지를 쓸 때는 약간 더 거리감이 느껴져도 괜찮으니까, 그 때는 종종 '저'를 쓰곤 합니다. 특별히 무슨 규칙이 있는 건 아니고 쓸 때마다 그냥 이 문장은 '나'가 좋겠다, 이 문장은 '저'가 좋겠다, 이렇게 느낌 오는 대로 씁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제가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애인님 밖에 없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넷 상에서 덧글 달 때처럼… 음… 그런 정도의 거리를 가진 사람들, 사실상 오늘 처음 만난 거나 다름없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쉬이 쓸 정도로 광범위하게 쓰는 건 절대 아니며, 오히려 아주 일부, 극소수, 대단히 미묘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만 쓴다는 거죠.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홍지로입니다." 이건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이틀, 사흘에 한 번 정도는 이런 표현을 보게 되니까, 이것도 그렇게 널리 쓰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들더군요. 하기야 존댓말에 관해 배울 때 항상 "저"를 쓰라고 배운 기억이 나진 않으니까요(너무 당연히 여겨왔던 것이라 그렇겠지요.). 정확히 알아보자면 우리말 규정을 뒤지든지 우리말 배움터 같은 곳에 문의를 해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귀찮고 게으른 죄로, 그런 표현을 발견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덧 하나. 생각해보면 그런 표현을 만난 건 아동 대상의 영어 교재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I am a boy."를 "나는 소년입니다."로 번역한 그런 책들 말이죠(하긴 대게는 "나는 소년이다."였던 것 같습니다만.). 어쩌면 인칭 대명사에 존대 의미가 없는 영어 때문에 그런 표현이 새로이 널리 쓰이게 됐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덧 둘. 이런 표현을 별 생각 없이, 그러니까 제가 존댓말에 “저”를 쓰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쓰는 게 아니라, ‘난 반드시 이런 표현을 써야겠어.’라고 의식을 가지고 쓰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경우에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권력, 평등, 뭐 그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로 들어가면 상대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까닭 없이 한 수 접고―스스로를 낮추고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 동등한 위치에서 발언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런 표현을 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존댓말 자체가 존대하는 사람을 낮추는 건 아니라고 보는 저로서는 알기 힘든 범위네요. 저는 “저”일 때 못 할 말은 “나”일 때도 못하거든요. “나”일 때 할 수 있는 말을 “저”일 때 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덧 셋. 가끔씩 묻는 사람이 있기에 생각나서 하는 소리지만, 애인님한테 쓰는 존댓말은 “액세서리”입니다. 요샌 반말도 적절히 섞어 쓰고 있어요. 이름만 부르는 게 낯설어서 살짝 아쉽긴 하지만.
|
알림
카테고리
최근 등록된 덧글
꼼꼼한 글 잘 읽었습니다..
by kinoeyes at 08/19 말씀하신대로 류승완 감.. by sabbath at 08/17 참 말할 거리가 많은 영.. by 파인로 at 08/17 그쵸. 사실상 모든 프랑.. by sabbath at 08/16 아, 그것은… 저도 무.. by sabbath at 08/16 저도 그 글을 읽어보았.. by sabbath at 08/16 제작사 외유내강 측의 .. by sabbath at 08/16 소식 고맙습니다! 포스터.. by sabbath at 08/16 가끔은 너무 만든 사람에.. by sabbath at 08/16 먼저 안 보신 분들께는 .. by sabbath at 08/16 저도 만주 벌판 액션이 참.. by sabbath at 08/16 [다찌마와 리] 속편 또.. by sabbath at 08/16 오오, 드디어 올리셨군.. by Sion at 08/16 드팔마를 떠올리는 장면.. by 다찌대박 at 08/16 저는 그놈의 잘생겼다!가.. by 은혈의륜 at 08/16 최근 등록된 트랙백
이전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