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고
 아카데미엔 원래 별 관심이 없었는데 (기왕에 볼 거면 골든글로브나 MTV Movie Award를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지난 일 년 간 애인님 따라서 마틴 스콜세지(요즈음의 흐름을 따라 Scorsese를 "스코시즈"로 읽으려고 일주일 동안 연습했는데 오늘 들어보니 "스콜세지"로 들리더군요.)의 열렬한 팬이 되기도 했고, 지난주에 〈에비에이터〉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응원도 할 겸 아침부터 OCN을 붙들고 아카데미 생중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봤습니다.

 적잖은 아카데미 냉소주의자들처럼 저도 아카데미 시상식의 결과에 별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편입니다. 아카데미의 선택은 대게는 저를 만족시키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상, 아카데미는 볼 필요가 없는 시상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고요. 하지만 오늘 몇 시간 동안 생방송을 지켜보고 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게 정말 공정한―과연 예술 작품의 평가에 “공정함”이라는 말을 이렇게 쉽게 붙여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시상식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압니다. 아카데미의 로비 이야기는 이미 비밀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카데미 시상식은 정말 대단한 엔터테인먼트 쇼였습니다. 중간 중간의 주제가상 후보작 공연이라든가 사회자의 입담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뭐랄까, 전체가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에비에이터〉를 지독히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 그리고 쟁쟁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이 중 좋아하는 작품이 하나도 없었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작품 외에 쓸만한 작품이 하나도 없어서 수상이 확실시되었다면 오늘 제가 맛본 정도의 흥분을 느끼지는 못했을 테지요(예를 들어, 저는 이미 〈인크레더블〉을 두고 “디즈니 로고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거의 완벽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영화를 좋아하지만 〈인크레더블〉의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에는 별로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너무 당연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카데미에는 그 이상의 뭔가가 있습니다. 저는 그걸 할리우드라는 영화 산업 시장의 규모가 아니라 77회라는 이 행사의 역사에서 찾고 싶습니다. 아카데미에서의 수상은 그저 그 해의 뛰어난 작품에 가는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거든요. 오히려 이건 그 동안 쌓인 수십 년의 세월을 합친 어떤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오스카를 네 번이나 가져간 캐서린 헵번과 케이트 블란쳇이 겹쳐지는 순간, 아네트 베닝이 또 다시 힐러리 스웽크에게 여우주연상을 빼앗기는 순간, 초반에 잘 나가던 〈에비에이터〉가 감독상과 작품상 중 어느 것도 타지 못해 또 한 번 스콜세지를 무관의 제왕으로 만드는 순간 느껴지는 감정이란 바로 그 세월의 축적이 있지 않고서는 느껴지지 않았을 겁니다. 아카데미는 한 해의 작품들을 결산하는 시상식이라기보다는 할리우드의 역사고 전통이고 관례이며, 제의(祭儀)에 가깝다고 봅니다. 저는 그 의식(儀式)적인 거창함에 매료당하는 거고요.

 77회 아카데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카데미는 유례없이 “공정한” 아카데미였습니다. 부문별 수상자들에 대해 강하게 반발할만한 구석이 얼마나 있나요? 전 거의 찾질 못했습니다. 물론 〈에비에이터〉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환성을 지르며(정말 질렀습니다.) 주먹을 휘두르긴 했지만(정말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남우주연상과 감독상, 작품상을 모두 놓치고 나서 완전히 절망해서 몇 십 분을 넋 놓고 앉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카데미의 선택은 적절했다고 봅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지 않았습니다만 〈에비에이터〉로 스콜세지에게 상을 주는 건 확실히 꺼림칙한 일입니다. 스콜세지라는, 여전히 젊은 거장에게 필요한 건 세월에 대한 예우나 과거의 패배에 대한 동정이 아닐 테고요. 저는 그의 또 다른 〈성난 황소〉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제게 딱 하나 의아하게 여겨지는 게 있긴 했는데, 그건 촬영 부문. 왜 〈콜래트럴〉이 후보에 들어있지 않은지가 궁금하더군요. 마이클 만 영화 화면의 때깔이야 익히 알려진데다가 특히 이 영화는 감상자 대부분이 톰 크루즈나 제이미 폭스를 언급하기 이전에 LA의 야경에 대해 이야기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특히 즐거웠던 수상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에비에이터〉의 케이트 블란쳇이 여우조연상을 받은 것, 〈에비에이터〉의 델마 스쿤메이커가 편집상을 받은 것,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의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상을 받은 것, 시각 효과상을 〈스파이더맨2〉가 받은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오래 전에 받아야 했던 이들에게 드디어 상이 갔다는 느낌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시드니 루멧 감독의 공로상 받을 때 알 파치노와 마주선 모습, 또 그가 스티븐 스필버그에서부터 여러 감독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끝에 가서 버스터 키튼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다시 한 번, 아카데미는 할리우드의 제의인지도 모릅니다.

 하긴, 이런 즐거움도 어쩌면 77회 아카데미만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을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아카데미에 열중한 건 올해가 처음이니까요. 내년에 두고 볼 일입니다.
by sabbath | 2005/02/28 21:18 | 20030930~20050514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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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프리스티 at 2005/03/01 01:35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도대체 어떤 작품인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Commented by Jinny at 2005/03/01 07:46
아카데미 시상식 재미있던걸요. 그 화려함, 축제와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하며. 상을 받은 분들의 환희와 기쁨, 감격 같은 것도 그렇고요. 에비에이터 분위기로 가다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주요 상을 다 휩쓸면서 최고의 고조로 달하는 그 모습. 맞아요. 할리우드의 전통과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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