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석일, 『피와 뼈』
 최양일 감독, 비트 다케시 주연의 〈피와 뼈〉가 뛰어난 영화라는 소리도 들리고, 한 시퀀스가 인공기 때문에 통째로 잘려나갔다는 소리도 들리며, 좋은 (그러나 작은) 영화들이 곧잘 그렇듯 제대로 입소문도 타기 전에 극장에서 내려갈 전망이라는 소리도 들리지만 나로서는 아무래도 열정적으로 반응하기 힘든 것이, 광주에선 이 영화의 포스터 한 장 보기 힘들다. (다행히 지금 찾아보니 역시 광주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조만간 찾아가야겠다.)

 그래도 최양일 감독의 데뷔작 〈10층의 모기〉가 지닌 맛을 기억하고 있던 나로서는 지독하기 이를 데 없다는 이 영화의 관련 정보를 여기저기서 모으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양석일의 『피와 뼈』가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런저런 인터넷 서점에서 양석일로 검색해 보고 목록에 없어서 ‘아, 안 나왔구나. 영화 개봉하고 나와 주면 좋을 텐데.’ 정도로 넘겼던 게 실수였던 것. 『피와 뼈』는 이미 1998년에 자유포럼이라는 출판사에서 김석희 씨의 번역으로 세 권 분책 출간된 바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절판이지만 이렇게 별 인기 없는 책은 구하기가 쉬운 터라 그 즉시 여기저기 몇 군데 알아본 뒤 세 권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헌책방에 주문해 6천원에 세 권을 사서 읽었다.

 처음엔 책을 붙들고 앉아있자니 책장이 미국의 대중 스릴러 소설만큼 휙휙 넘어가서 좀 당혹스러웠다. 영화가 지독하게 냉정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미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지독”에만 초점을 맞추고 “냉정”을 잊고 있었던 것. 김준평이라는 괴물 같은 인간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인물들 속에서 벌어지는, 신경이 타 버릴 것 같은 심리적인 긴장감 묘사를 생각하고 있었건만 완전히 반대였다. 작가는 오히려 지독할 정도로 간결하게 인물의 외면만 그려낸다. 물론 심리를 파고드는 부분이 군데군데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도 대게는 한두 단락에서 끝을 내고 나머지는 이런 일이 있었고 무슨 말을 했고 하는 식으로 철저하게 인물의 대사와 행동에만 집중하는 것. 폼도 절대 안 잡는다. 피가 질퍽하게 흐르는 격투 장면도 이런 식이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쇠갈고리를 번쩍 쳐들었다. 갈고리 끝이 김준평의 어깨에 박혔다. 폭력배는 그 갈고리를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김준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깨 근육에 파고든 갈고리 끝이 뼈에까지 닿으려 하고 있었다. 피가 뿜어져 나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준평은 갈고리 자루를 움켜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폭력배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김준평은 벚나무 몽둥이를 내리쳤다. 머리통이 박살났다. 이어서 김준평은 어깨에 박혀 있는 갈고리를 빼내더니, 폭력배들에게 돌진해가면서 그중 한 놈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쳤다. 갈고리 끝은 폭력배의 이마에서 왼쪽 눈까지를 찢고, 낫모양의 날이 코도 베어냈다. 견디다 못한 놈은 두 손으로 코를 누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덤벼, 이놈들아. 모조리 죽여주마!”

 이렇다보니 1권의 반을 다 읽도록 ‘아니, 이런 게 뭐가 훌륭하다고 호들갑인 거냐.’ 싶었다. 물론 외면만을 그려내는 방법이 안 좋다는 건 아니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런 수법을 좋아한다. (“시각 이미지로서의 영화”에 집착하는 브라이언 드 팔마를 좋아하는 내가 그런 걸 싫어할 리 있겠는가? 다만 소설에서는 그런 유형의 작품을 자주 만날 수가 없다는 게 문제지.) 황순원의 「소나기」가 보여주는, 그 철저히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서술 속에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는 그런 순간순간을 나는 분명히 좋아한다.

 하지만 『피와 뼈』의 1권을 보니 이게 그렇게 섬세한 작품도 아니었다. 생각이 곧 행동으로 나오는, 지독하게 즉물적인 김준평이라는 캐릭터를 다루는데 섬세해봐야 얼마나 섬세할 수 있으랴? 물론 이 작자가 하는 짓이 지독한 짓이라는 걸 알긴 알겠지만 그게 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거나 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손님으로 찾아온 김준평과의 섹스에서 희열을 느끼는 창녀 야에는 물론이고, 강간당한 뒤 어느새 아내까지 돼 버린 영희에게도 딱히 이입할만한 감정이 느껴지질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거 무슨 야설이냐. 남자는 꼴리면 강간하고 여자는 정력에 압도당해 오르가즘 느끼게.’ 싶었다.) 당연하지. 앞에선 한 번도 안 나오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김준평 눈에 들어오고, 일단 꼴리니까 범해버리는 걸로 줄거리 중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대체 얼마나 이입할 수 있을까? 만약 이 부분에서 어떤 들끓는 감정을 느꼈다면 (나는 느끼지도 않았지만) 그건 이 작품의 힘이라기보다는 그냥 강간이라는 행위에 대한 일반 사회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듀나가 〈피와 뼈〉 시사회에 갔다 와서 분노하거나 역겨워하기 보단 그저 무덤덤하게 〈동물의 왕국〉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는데, 영화가 소설에 충실하다면 정말 그럴 법 한 이야기다.

 이렇게 이입할 구석 하나 없이 꼴리면 범하고, 싸움나면 때려죽이던 김준평은 싸우다 한 번 크게 다친 뒤 가출해버리고, 이야기는 갑자기 그의 주변 인물들로 옮겨간다. 어묵공장 시절부터 함께 일해오던 고신의가 재일한인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이야기를 한참 다루던 소설은 이내 김준평의 아내 영희에게 고개를 돌려 그가 남편의 폭력 속에서 고생고생하며 집안을 이끌고 가는 모습을 한참 열심히 보여준다. 물론 김준평이 가끔씩 집에 돌아오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허구한 날 술주정에 계집질뿐이다. 김준평의 비중이 좀 약해지는 이 부분에선 양석일의 “리얼”한 사회 묘사가 좀 더 빛을 발하면서 이야기의 배경을 채워나간다. 그렇지만 결국 보여주는 게 끊임없이 김준평에게 시달리는 영희와 아이들의 모습, 혹은 전쟁 중에 점점 빡빡해져가는 인물들의 삶인지라, 2권의 절반, 그러니까 전체 작품의 절반을 다 읽어가도록 과연 『피와 뼈』라는 소설이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의 작품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했다. 이 소설이 하는 일이 동물적인 (“폭압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사치다!) 가부장 및 전시 일본 사회 속에서 고통 받는 재일한국인 사회의 모습을 그려내는 정도에 그친다면, 그것도 이렇게 건조하게 표면적인 고생담만 들려줄 정도라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다고 그러는 건가 싶었던 것.

 그렇게 책장은 넘어가도 마음은 넘어가지 않던 이야기는 김준평이 어묵공장을 차리겠다고 나서는 순간부터 갑자기 폭발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고, 그래도 꼴에 주인공이라고 앞으로 나서니까 가닥이 좀 잡히네.’ 싶었는데 찬찬히 읽어 나가자니 그게 아니라, 작품 초반부에서 사실상 불가해한 폭력 그 자체로 그려졌던 김준평과 중반부에서 그 폭력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졌던 그의 가족들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일종의 소용돌이 같은 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김준평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여전하지만 (누가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불가항력적으로 그의 세계에 끌려 들어온 주변 인물들이 비로소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한 폭력의 실체를 바라보며 느끼는 중압감은 뒤늦게 본격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그 동안 그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사회 현실”이라는 것조차 탈색되면서 김준평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제야 김준평이 뒤로 물러나 있다고 생각했을 때조차 주변 가족들은 언제나 그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되새기게 되면서, 이 인물에게서 풍겨오는 극악무도함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 서서히 김준평의 몰락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점점 스스로를 가족들로부터 차단시켜 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 놀랍게도 연민이라고 할만한 어떤 감정까지 느껴진다. 이건 거의 경악스런 반전이다. 내가 느껴놓고도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아서 한참을 고민했을 정도였다. 솔직히 여전히 대체 왜 거기서 연민을 느꼈는지 확실히 설명하긴 힘들다. 하지만 그건… 굳이 근사값을 빌려보자면 멸종 위기에 처한 식인 호랑이를 볼 때 느껴지는 감정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그런 삶의 방식 밖에 취할 수 없기에 그렇게 살아가고, 그래서 그 안에서 홀로 죽어야만 하는 존재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안타까움이랄까. 이것은 근사값에 대한 이야기고, 여기서 다시 그 식인 호랑이를 김준평이라는 인간으로 대체해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었을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즉물적인 폭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스스로 잘라낸 인간. 그렇기에 발악하다 파멸할 수밖에 없으며, 그 피와 뼈조차 남길 수 없는 인간. 김준평에 대한 연민은 그런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연민이 아니었나 싶다.

 (여담이지만, 김준평이 자신의 피와 뼈조차 남길 수 없는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종종 이 피와 뼈를 대물림되는 혈족의 숙명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봐왔으니까. 한국어판 2권 뒤표지에 실린 아사다 지로만 해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하지만 나는 사다코나 사다코의 네 자식, 혹은 장남 김성한이 그 아비에게 보여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함이 김준평의 악독함과 같은 부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준평은 그 자신에게서 끝났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국 『피와 뼈』는 실재하지만 불가해한 폭력,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한 연민을 다루는 작품이다. 듣기만 해도 느껴지듯이, 사실 이건 굉장히 안 어울리는 짝패이며, 그렇기에 이 작품이 많은 사람과 소통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 역시 그 지독한 풍경의 끝자락만 간신히 잡아챈 정도의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거기엔 여전히 어떤 현실적인 접점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굳이 김준평이 작가 양석일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는 작품 외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김준평이라는 이름의 불가해한 폭력은 정말 피와 뼈를 갖추고 이 시대에 실존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런 예감을 쉽게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엔 그 예감을 확인하고자, 혹은 좀 더 작품과 소통하고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저 하루 만에 몰아서 다 읽고 한숨을 내쉬며 책장 한 구석에 포개어 눕혀놨을 뿐.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내용을 인용하기 위해 잠시 꺼내보는 사이에 어느새 세 권 모두가 내 책상 위에 다시 나왔다. 『피와 뼈』는 그런 책이 아닐까 싶다. 잠시 가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잊을 수는 없는 이야기에 대한.



 덧 하나. 근처 서점에 재고가 한 권씩 있던데, 정가로라도 사 보고 싶으신 (써놓고 보니 약간 이상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품이란 원래 정가 구입이 기본 아닌가?) 분께선 덧글 달아주시길. 사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덧 둘. 김석희 씨도 참 번역 많이 하는 번역자다. 그런데 이 사람이 손대는 언어의 범위가 참… 일단 프랑스어, 일본어, 영어를 번역할 수 있는 건 분명한 모양인데, 그 외에 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전집에도 이 사람 번역이 하나 있고, 『황석영 삼국지』가 나올 즈음에 시류를 타고 나온 주대황의 『반삼국지』에도 떡하니 김석희 이름 세 글자가 박혀 있으니……. 번역작들의 범위를 봐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걸물이 아닌가 싶다. 먼 옛날 시공주니어에서 나온 J.R.R. 톨킨의 『호비트』에 오역이 있다고 지적당했던 걸 제외하면 이 사람 번역에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도 보지 못했고 말이지.

 덧 셋. 글을 쓰면서 느낀 건데, 저런 식의 연민을 느낀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2003년 5월 18일(헉, 노린 건 아닌데 묘하게도 절묘한 날짜에 봤구나.)에 코아아트홀에서 혼자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을 봤을 때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What a Wonderful World”가 흘러나오면서 미국이 세계 각국에 자행한 만행이 제시되는 시퀀스. 그 장면에서 정말 펑펑 울었는데 분명히 말하거니와 그 때 내 울음은 화면에 나오는 피해자들을 위한 게 아니라 가해자인 미국을 위한 것이었다. 말로 옮긴다면 어떻게 해도 조악하게 들릴 테지만, 뭐랄까… 저러고 있는 스스로를 알지도 못하는 미국이 불쌍해서 울었다. 그걸 떠올리고 나니, 『피와 뼈』는 어쩌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불합리한 폭력에 대한 일종의 우화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덧 넷. 짐작한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을 감상하고 시간이 좀 흘러버리면 감상문을 안 쓴다. 냉엄한 비평문으로 작품을 어루만질 생각이 아닌 이상에야 감상문에는 반드시 그 작품과 접촉해 있는 동안의 내 감정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를테면 나는 블로그에 꼭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 감상문을 올려두고 싶고, 그 영화는 많이 봐서 굳이 다시 보지 않더라도 어떤 이야기든 지금 당장 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로 『피와 뼈』를 읽은 지 나흘이 지났기 때문. 그 나흘 동안 나는 세 편의 영화를 봤고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그 중 하나는 단편집이라서 작품 수로 따지면 열 작품이다.) 완독하지 않은 소설이나 그 외 서적을 제외하고 그렇다. 보통 그 정도 시간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 그렇게 다른 작품을 감상했다면 사실상 감상문 쓰는 건 포기하는 게 원칙이다. 그렇지만 그 간격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간단하게나마 『피와 뼈』에 대한 감상을 어떻게든 적어두고 싶었고… 그렇더라도 이 길이의 글이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나는 이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거나 이 작품에 매료당한 게 아니다. (생각해보면 같은 말 아니냐고 화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 심정으로는) 오히려 이 작품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다.

 덧 다섯.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는 걸로 글을 시작했는데 다 쓰고 나니 보러 가기 싫어졌다. 영화로 만들기에 적절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by sabbath | 2005/03/13 20:33 | 20030930~20050514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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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ithrandir at 2005/03/13 21:01
구입하고 싶습니다. mithrandir@mithrandir.co.kr로 연락주시면 감사...
Commented by _권_ at 2005/03/13 21:27
책도 구해보고... 영화서 보러 가야겠어요...
Commented by 프리스티 at 2005/03/13 22:11
영화 보고 왔습니다. "피와 뼈를 대물림되는 혈족의 숙명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최양일 감독도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하긴, 원작은 원작일 뿐이지만.
Commented by sabbath at 2005/03/13 22:31
mithrandir / 메일 보냈습니다. 그냥 여기다 비밀글로 주소 가르쳐주셔도 상관없고요 :-)
Commented by sabbath at 2005/03/13 22:32
_권_ / 서울에서도 이제 하이퍼텍나다에서만 상영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려면 서두르셔야 할지도. (전국에서 이거 상영하는 극장이 셋 뿐이더군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5/03/13 22:34
프리스티 / 영화를 안 봤으니 섣부른 추측밖에 되지 않겠지만, 아들과 아버지의 격투가 극적인 장면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분위기가 나올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흠… 이걸 당장 볼지, 아님 DVD 나올 때까지 미뤄둬야 할지…
Commented by 프리스티 at 2005/03/13 23:13
아, 하이퍼텍 나다에서 본 영화 중에서 제일 관객이 많았습니다. 거의 꽉 찼더군요. 세 시간 전에 미리 표 사놓길 잘했다고 생각 (...)
Commented by rumic71 at 2005/03/13 23:30
언어폭이 넓은 번역자는 예전에도 있었죠. 정성호라던가, 이미도라던가(어이!)
Commented by sabbath at 2005/03/14 00:18
프리스티 / 그렇겠죠. 그냥 좋다는 수준도 아니고 걸작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는데 극장에서 얼마 버티지 못했으니.
Commented by 보르헤스 at 2005/03/14 20:48
피와 뼈, 예고편만으로도 충분히 으시시(?)하더군요..
기타노 다케시 좋아하는 데 영화 보러 가기가 두렵습니다..
Commented by 보르헤스 at 2005/03/14 20:54
참,"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안보셨나요? 새벗님 감상이
궁금한데... (많은 분들이 감동적이었다고 하는데,
저는 감동이 지나쳤는지(?),보고 나서 한동안
가슴에 돌을 얹어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5/03/14 21:07
보르헤스 / 예. 아직 안봤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는 보기가 힘들어요. 이유는? 우습게도 이 사람 영화를 보려면 필모그래피를 어느 정도 훑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들〉부터 시대순으로 훑은 다음에야 최신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곤란한 강박관념 말이죠. 극복해야 할텐데…….
Commented by sabbath at 2005/03/14 21:09
근데 더 웃긴 건, 〈용서받지 못한 자들〉을 보려고 할 때마다 또 이 영화를 보려면 웨스턴 장르를 어느 정도 훑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는 겁니다. 정말 문제는, 제가 존 포드로 대표되는 고전기 웨스턴 장르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고요.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는 제겐 미칠듯이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질 지경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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