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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듀나가 써먹은 방식이긴 하지만, 역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제목에 언급된 “블림프 대령”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듯 하다. 이 어휘는 제목에만 쓰일 뿐 실제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누구나 알고 있는 캐릭터도 아니니까.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이 블림프 대령(Colonel Blimp)은 “만화가 · 풍자 작가인 데이빗 로가 만든 캐릭터로, 새로운 사고방식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보이는 뚱뚱하고 거만한 퇴역 장교”이며, 이미 이런 타입의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는 어휘이기도 하다.
블림프 대령이라는 캐릭터와 더불어,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에 대해 한 가지 더 알아둘만한 사전 지식은 1943년에 영국에서 개봉한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선전 영화로 제작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제목과 영화의 역사적 배경을 조합하면 이 영화가 블림프 대령 같은 인물을 내세운 뒤 그를 풍자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라는 새로운 적을 앞에 두고 개혁을 꾀하지 못한 채 보수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영국 군대에 대한 풍자와 반성 의식을 담고 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틀렸다. 이 영화의 제목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블림프 대령”보다는 “삶과 죽음”이며, 좀 더 중요한 것은 실제 영화에서 그 제목이 등장하는 오프닝 크레딧에 배경으로 깔리는 돈 끼호떼의 삽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주인공 클라이브 윈 캔디(로저 리브지)를 보수적인 퇴역 군인의 캐리커처로 만들어서 그를 조롱하는 대신에, 그의 겉껍질을 벗기고 속내로 들어가 이 인물의 일생을 면밀히 따라감으로써 그의 삶에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그럼 이 영화는 모든 새로운 사상에 반대하는 완고한 인물을 깊게 파고듦으로써 “그렇지만 그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라고 쓰다듬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묘사하는 클라이브는 사실 블림프 대령과 같은 완고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돈 끼호떼와 같은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 그 시점에서 이야기는 약 40년 전인 1902년, 막 남아프리카의 보어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뒤 빅토리아 훈장까지 받고 돌아온 젊은 장교 클라이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놀랍게도 그 시절의 그는 스펏 이상으로 열정적인 청년이다. 그는 보어 전쟁에서의 영국군에 대한 비방을 늘어놓는 독일군의 중상모략에 분개하여 상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일까지 가서 외교 문제로 불거질 것을 불사하고 독일군 장교와 싸움을 벌이며, 그로 인해 정식 결투까지 치를 정도의 인물이다. 클라이브가 조국의 명예를 위해 혈혈단신 독일로 가서 독일 장교들과의 시비 끝에 결국 생면부지의 독일 장교 테오 크레츠마 슐도프(안톤 월브룩)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특히 명장면으로 꼽을만한데, 여기서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엄숙하고 복잡하여 우습게 보이기까지 하는 결투 전의 절차 및 결투 규칙 낭독 과정을 심혈을 기울여 묘사한 뒤 정작 클라이브와 테오가 결투를 시작하면 카메라를 들어올려 건물 밖으로 나가서는 고요한 가운데 아름답게 눈이 내리는 체육관의 정경을 보여준다. 그 서정적인 장면은 다시 클라이브의 안위를 걱정하는 영국 외교관과, 클라이브의 동료인 이디스 헌터(데보라 카)의 대화 장면으로 연결된 뒤 바로 입원해 있는 클라이브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후 대화를 통해서 클라이브는 여덟 바늘, 테오는 열두 바늘을 꿰맸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결투의 승패에 대한 더 이상의 정보는 제공되지 않으며, 이야기는 오히려 같은 병원에 입원한 클라이브와 테오가 국경을 뛰어넘는 끈끈한 우정을 쌓아가는 것으로 전개된다. 즉, 클라이브의 세계관을 규정짓는 것은 승자와 패자의 냉혹한 가름이 아니라 예의와 규범이 살아있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우러나오는 서로에 대한 이해다. 결국 그는 기사도가 죽어가는 시대의 기사인 셈이다. ![]() 한편 클라이브의 이상주의는 그의 애정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시 1902년으로 돌아가 보면, 클라이브는 젊고 열정적인 아가씨 이디스 헌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는데, 1902년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녀는 그와 친구가 된 독일군 장교 테오와 사랑에 빠진다. 이 시점에서 클라이브는 진심으로 두 사람의 행복을 비는 것 같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교묘한 연출은 그와 그녀 사이에 미묘한 감정선을 깔아두고 있다. 두 남자가 처음 병원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클라이브의 곁에 서 있던 이디스는 테오의 통역을 담당한 부인에게 밀려 점차 테오 쪽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서 이디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포착해내는 클로즈업이 한 차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공간 배치 및 편집도 절묘하게 이뤄지는데, 이런 연출은 나중에 그녀가 테오와 약혼하고 클라이브와 이별하게 되는 장면에서 서로에 대한 우정이나 축복 이외의 은근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 이 이상주의자의 삶 속에 보다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테오 크레츠마 슐도프다. 1902년에 헤어진 두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승자와 패자의 입장으로 포로수용소에서 다시 마주하는데, 클라이브가 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그에게 다가서는 반면에 테오는 패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자각하며 그와 거리를 둔다. 이 시점에서는 (드디어) 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지는데, 바로 친구이자 패자인 테오라는 인물이 이 영화를 단순한 선전 영화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다. 이를테면 클라이브가 독일로 돌아가기 전의 테오를 붙잡아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는 선전 영화로서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패배자로서 얼굴을 굳힌 채 앉아있는 테오에게 함께 식사 중인 영국 고위 관료들은 독일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영국의 의지는 결코 점령이나 억압과 같은 게 아님을 강조하면서 희망찬 비전을 섞어 그를 위로하려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 독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테오는 동료들에게 영국인들의 안일한 태도를 이야기하며 그들을 조소하는 듯 하고, 뒤이어 바바라가 자신의 남편과 동료들이 테오에게 한 이야기에 대해 회의를 표하는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이 영화에 선전영화 이상의 복잡함을 부여한다. 이런 미묘한 정치적 접근은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특히 독일을 탈출해 망명 심사를 받는 테오가 영국인 친구를 두고 영국인 아내와 결혼한 패전국의 국민인 동시에 나치즘의 광풍 앞에 자식들을 잃은 “독일인”으로서의 자신을 회고하는 고백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독일과 나치를 구분 짓는 이 묘사의 깊이는 굳이 1943년이라는 이 작품의 개봉 시기나 선전 영화라는 기본 기획 의도를 논외로 하고 보더라도 남다른 데가 있다. (할리우드에서 죽어간 수많은 중동 테러리스트들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 결국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 화면 안에 등장하는 것은 평생을 낭만과 이상 속에 살아오며 빛을 발했던 클라이브 캔디라는 인물과, 한때 클라이브와 같은 이상적인 시대를 살았으되 (그 자신의 고백처럼) 패배를 통해 교훈을 얻어 이상과 현실을 조율하고 양자를 모두 포용하는 시선을 보내게 된 테오 크레츠마 슐도프, 그리고 두 사람의 연인이었던 동시에 혈기왕성한 현실주의자 스펏 윌슨을 사랑하는 여인 조니다. 영화는 그 모두를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그렇기에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죽은 아내를 떠올리며 자신이 옛날과 다름없는 사람임을 선언하고, 동시에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하고 격려하고자 하는 클라이브의 모습은 어느 쪽으로든 강력한 설득력을 갖추고 다가온다. 정말이지,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왕년”과 “젊은 것들” 사이에 걸쳐진 한 인간을 그려낸 가장 힘 있고 아름다운 영화다. 섬세한 유머 속에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는 각본, 재치 있는 생략과 고풍스럽고 웅장한 테크니칼라의 색감으로 무장한 유려한 연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인물들의 감정을 충분히 살려내는 훌륭한 배우들. 아, 이거야말로 영화라는 예술 장르가 제공할 수 있는 최상품이 아닐까. ![]() 덧 하나. 글 앞에 언급한 것처럼 “Colonel Blimp”는 이미 고유명사를 넘어서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는 어휘이기 때문에 굳이 옥스포드 사전까지 꺼낼 필요 없이 옆에 있는 엣센스 영한사전만 찾아봐도 된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엣센스 영한사전 제8판에서는 이 어휘를 “거만하고 반동적인 중년 군인”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 캐릭터를 특징짓는 “꽉 막힌 보수주의”와, 그에 대한 풍자의 의미를 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전자사전에 수록된 프라임 영한사전도 마찬가지였고. 이 두 사전이 사용한 “반동”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이 캐릭터가 보수적인 체제 안에서 기행(奇行)을 일삼는 톡톡 튀는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는지? 덧 둘. 혹자는 이 작품을 “영국의 〈시민 케인〉”으로 부르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보다는 에른스트 루비치의 걸작 〈천국은 기다려준다〉가 더 떠올랐다. 평면적인 (것처럼 보이는) 인물상을 제시한 뒤 그 인물의 일생을 돌이켜보며 거기에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는 구조를 지닌 각본은 물론이고 유머 감각과 생략적 연출, 화려한 테크니칼라 등 이 영화가 지닌 뛰어난 부분의 상당수가 바로 루비치에게서 보았던 것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두 작품은 발표연도도 같다. 덧 셋. 스펙트럼의 마스터피스 콜렉션Masterpiece Collection은 초창기에는 〈위대한 환상〉, 〈밀회〉 등 크라이테리언 콜렉션을 립핑한 타이틀로 욕을 좀 먹었지만 최근에는 정식 판권을 구입한 작품만 내고 있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천국으로 가는 계단〉, 〈검은 수선화〉, 〈분홍신〉을 수록하고 있는 마스터피스 콜렉션 스물세 번째 타이틀 〈마이클 파웰&에머릭 프레스버거 콜렉션〉의 경우, 크라이테리언에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제외한 세 작품을 출시한 바 있기 때문에 립핑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는데, 스펙트럼 판은 크라이테리언과는 상관없이 영국에서 정식 판권을 산 버전이다. …그래서 그냥 만족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크라이테리언은 역시 다르다. 제길, 세 편 모두에 마틴 스콜세지의 음성해설이 담긴 게 아닌가! (마틴 스콜세지는 잊혀졌던 파웰과 프레스버거를 되살려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 중 하나다.) 게다가 그 중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한신코퍼레이션에서, 〈분홍신〉은 스펙트럼에서 (박스셋으로 내기 전에 따로 이 작품만 낸 적이 있었다.) 립핑판을 냈다. 립핑판 구입의 유혹이 넘실거리는 이 순간. 덧 넷. 아, 그래서 선전 영화로서는 어떻게 됐냐고?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이 "선전 영화"에 대해서 역정을 내면서 장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상영 금지 조치를 취하려 했고, 나중에 미국에서 개봉될 때는 무려 50분이 잘리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결국 수십 년 만에 다시 완전판으로 복원됐을 때 에머릭 프레스버거는 감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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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한 글 잘 읽었습니다..
by kinoeyes at 08/19 말씀하신대로 류승완 감.. by sabbath at 08/17 참 말할 거리가 많은 영.. by 파인로 at 08/17 그쵸. 사실상 모든 프랑.. by sabbath at 08/16 아, 그것은… 저도 무.. by sabbath at 08/16 저도 그 글을 읽어보았.. by sabbath at 08/16 제작사 외유내강 측의 .. by sabbath at 08/16 소식 고맙습니다! 포스터.. by sabbath at 08/16 가끔은 너무 만든 사람에.. by sabbath at 08/16 먼저 안 보신 분들께는 .. by sabbath at 08/16 저도 만주 벌판 액션이 참.. by sabbath at 08/16 [다찌마와 리] 속편 또.. by sabbath at 08/16 오오, 드디어 올리셨군.. by Sion at 08/16 드팔마를 떠올리는 장면.. by 다찌대박 at 08/16 저는 그놈의 잘생겼다!가.. by 은혈의륜 at 08/16 최근 등록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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