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파웰 & 에머릭 프레스버거, 〈검은 수선화〉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천국으로 가는 계단〉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 콤비를 만난 사람이라면, 두 사람의 1947년 작 〈검은 수선화〉는 꽤 당혹스럽게 여겨지는 작품일 것이다. 히말라야의 오지로 원주민 선교를 떠난 수녀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보여준 (물론 그들이 〈검은 수선화〉 이전에 그 두 작품만 찍은 건 아니다. 내가 보았고, 현재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이 그 둘일 뿐.) 경쾌한 유머 감각과 따스한 시선을 접어두고 종교 속에 억압되었던 욕망이 폭발하는 순간을 흉포하게 담아내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절정에 달한 듯한 테크니칼라 사용과 극도로 아름다운 세트다. 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히말라야 고산 지대의 성은 놀랍게도 스튜디오 안에 지어진 세트이며, 미술 감독 알프레드 융이 만들어낸 이 아름다운 세트 속에서 촬영된 영화 속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그 자체로 한 장의 그림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이 전에 이런 느낌을 받았던 영화는 찰스 로튼의 흑백 누아르-공포 영화 〈사냥꾼의 밤〉 뿐이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밋밋한 흑백의 천국과 대조를 이루는 지상 세계의 풍요로움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던 이 총천연색 화면은, 〈검은 수선화〉에서는 세트의 인공적인 느낌과 결합하면서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느낌을 자아낸다. 물론 이것은 영화의 내용과 완벽하게 부합되는데, 순백색의 수녀복이 경직된 수녀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동안 (과거에 그 지역 군주의 하렘으로 쓰였던) 성의 화려함은 그 수녀들 속에 잠재된 욕망의 세계를, 성 밖의 풍광은 수녀들의 세계와 마주보고 서 있는 광대한 자연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검은 수선화〉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두 세계, 즉 정갈하게 다듬어진 수녀로서의 세계와 거칠고 아름다운 자연인으로서의 세계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을 다루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도 흑백 천국 속의 사무직 천사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 종교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그보다 좀 더 종교색이 짙은 (사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천국만 나왔다 뿐이지 종교적 분위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니) 〈검은 수선화〉에서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다. 주인공 클로다 수녀(데보라 카)를 불러 히말라야에 분원을 설치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원장 수녀의 모습은 (차라리 인공지능 컴퓨터가 더 인간미가 넘친다고 느껴질 정도로 인간들이 건조하게 묘사되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등장인물들만큼이나 삭막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클로다는 단 한 번의 미소도 없이 냉엄한 태도로 의무와 권위를 받아들인다. 선교 장소에 도착한 이후 수녀들의 모습도 마찬가지. “나는 당신이 분원장이 된 게 못마땅하다. 당신은 아직 분원장이 될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니까.”라는 원장 수녀의 말을 듣고 온 클로다는 수녀로서의 자애로움보다는 관리자로서의 엄격함에 묶인 듯 하고, 필리파 수녀(플로라 롭슨)와 브라이오니 수녀(주디스 퍼스)는 노동 속에 지쳐가며, 처음부터 병을 앓고 있었던 루스 수녀(캐슬린 바이런)의 상황은 점점 나빠질 따름이다. 일행 중 유일하게 밝은 기색을 띤 하니 수녀(제니 라이드)는 그저 원주민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할 뿐, 성 전체에 깃든 음침한 기색을 몰아내지는 못한다.
 얼핏 보면 〈검은 수선화〉에서는 수녀들의 혼란을 이끌어내는 원인이 제시되지 않는 것 같다. 냉소적인 행정관 딘(데이빗 파라)과 클로다가 마찰을 겪게 되고, 그 지역의 젊은 장군(사부)이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왔다가 성에 기거하고 있는 소녀 캔치(진 시몬스)와 눈이 맞고, 수녀들의 몸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반점이 생길 뿐. 그러나 그 모든 사건들이 사소한 일인 것처럼 영화를 전개해 나가는 동안, 정말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극도로 계산됐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화면 속의 인위적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바로 그 아름다움이 독이 되어 가면서, 클로다는 수녀가 되기 전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필리파는 야채를 심어야 할 밭에 꽃을 심어 버리며, 루스는 딘을 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런 인물들 내면의 흔들림을 서서히 밖으로 드러내면서, 그리고 결국 치료 중이던 원주민 아이가 죽는 것을 기점으로 영화 속에서 원주민들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검은 수선화〉는 “선교 활동을 펼치는 종교인”의 문제가 아니라 “억눌린 감정 속에 고통 받는 종교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특히 갈등의 핵이 되는 것은 루스 수녀로, 시간이 흐를수록 신경증이 극에 달해 가면서, 결국 그녀는 클로다가 딘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질투심에 타오른다. 이 시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이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오해일 뿐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클로다가 딘에게 연정을 품었으리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내내 보아온 수녀로서의 경직된 태도와,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젊은 날에 대한 안타까운 회상들은 클로다의 정신적 흔들림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 안타까운 회상들이란 결혼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청년과의 사랑에 대한 회상이며, 따라서 설령 지금 겪는 흔들림의 원인이 딘이 아닐지라도, 클로다는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루스의 병적인 질투 앞에서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검은 수선화〉의 절정 부분은 단지 루스 개인의 병적인 질투심이 아니라 수녀들 모두가 품고 있었던, 그러나 감추고 있었던 욕망을 드러내는 셈이 된다.
 그리고 감춰진 욕망이 붉은 조명과 어둠 속에서 공포 영화를 방불케 하는 연출을 통해 표현되면서, 〈검은 수선화〉는 사실상 누아르 영화가 된다. 종교라는 정신 사회 속에 억눌린 개인의 불안을 보여주는 종교 누아르라고나 할까. 그 불안을 이기지 못해 결국 폭발해 버린 루스에게 남은 건 파멸뿐.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불안은 루스만의 것은 아니다. 결국 수녀들은 기한을 다 채우지 못하고 히말라야에서 등을 돌려버리니까. 어쩌면 그것은 불안을 직시하지 못하고 지워버리려는 또 하나의 도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던 루스와 클로다의 모습을 기억하는 한, 그리고 루스가 들어올린 립스틱 앞에서 클로다의 성경책이 한없이 미약했음을 기억하는 한, 그 불안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산중의 수도승처럼 모든 것을 끌어안거나 딘처럼 모든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수녀들이 그랬고, 사회 속에 몸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덧 하나. 이전 두 작품을 볼 때부터 생각해왔던 거지만 스펙트럼의 〈파웰 & 프레스버거 콜렉션〉의 화질은 그렇게 준수하다고 할 순 없겠다. 물론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쁨을 안겨주긴 하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 영화의 큰 특징 중 하나가 화려한 테크니칼라의 사용임을 생각해 보면 아쉬움도 만만찮다. 크라이테리언은 역시 좀 더 나을까?

 덧 둘. 이 사람들 영화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교묘하게 피해간다는 생각이 든다. 선전 영화나 홍보 영화였던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물론이고 〈검은 수선화〉도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참 예민하게 반응하기 쉬운 “오지의 선교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물론 영화의 중심이 선교 활동에 있는 게 아니다보니 피해갈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언뜻언뜻 나타나는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딱히 거치적거리는 곳이 없는 게 참 신기하다. 하렘을 관리해오던 노파라든가 젊은 장군을 유혹하는 데에 혈안이 돼 있는 캔치의 경우는 괴이한 주술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딱히 아시아 민족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그냥 그 캐릭터의 기괴함 속에 녹아 있는 듯한 느낌. 그러고 보면 오히려 민족적, 지역적 특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방법만 고수하다가 결국 실패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히려 비판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by sabbath | 2005/03/22 13:10 | 20030930~20050514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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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yasujiro at 2005/03/22 14:33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마이클 파웰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바가 없었는데 이번에 읽어보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읽으면서 왠지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가 떠오르기도 하는군요.
Commented by 매니아 at 2006/02/06 04:00
어제 이 영화를 봤는데 루스수녀역을 맡았던 캐슬린 바이런의 으스스한 연기가 꽤 인상적이었어요 그 배우에 대해 알고 싶어 찾아봤지만 나온 정보가 거의 전무하더군요 아시는 분 계실까요?...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2/06 09:28
매니아 / IMDB의 정보에 따르면─런던 출신의 배우로, 마이클 파웰과의 작업 덕분에 유명해진 뒤 4~50년대에 할리우드에 있었으나 좀처럼 배역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된 이유가 바로 〈검은 수선화〉에서의 호연 때문에 정신병적인 인물에 특화된 배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군요. 저런.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니 TV 시리즈를 주 무대로 활동한 모양입니다. 〈엘리펀트 맨〉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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